늙어 버린 채로 태어나는 아이라는 소재가 독특하지만 보는내내 환타지적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벤자민이란 캐릭터는 특별한 출생과 시간 역행이란 점을 빼면 다른 등장인물들과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평범해서 일거다. 삶의 소소한 일상들 그 시시콜콜함들의 나열, 이런것들이 모여 한 사람의 일생이 된다는 거 뻔할 뻔인데 왜 이 영화는 감동을 주는가. 인생을 이야기하는 많은 영화가 있었지만 이 영화만큼 몰입감을 주지는 못했다. 이 영화의 무엇이 나로 하여금 불각시에 얼음송곳이 등짝에 넣어지는 느낌이 들게 했을까. 영화를 본 후 '나의 삶을 뚫어져라 살피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알아보니 세대를 초월해서 사랑받은 영화라고 한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살아갈 인생과 살아온 인생를 동시에 조망하게 만든다는 거는 쉽지 않은데 그걸 해낸 거다. 내게는 어떤 설교나 법문 이상으로 이 영화가 다가왔다.
삶은 무상(허무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변화무쌍하다는 얘기)하다. 무상하다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상하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상하다고 여기며 산다. 머리속으론 삶의 무상을 이해하면서도 맘속에선 자신의 존재가 영원할 거라 생각한다. 어떻게든 젊어지기만 한다면, 영원한 삶을 얻을 수만 있다면 무슨짓이라도 하는게 사람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내면 깊은 곳에선 죽음을 기다리며 떨고 있음을 말해준다. 산다는 건 달리 말해 조금씩 죽어간다는 뜻이다. 죽음은 인생의 끝자락, 아주 먼 곳에 있는게 아니라 지금 현재 나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죽음을 떠올린다는 건 너무 괴롭다. 그래서 애써 외면하고 모른척 살아가는데, 이 영화는 그걸 끄집어 낸다. 장마철 곰팡이 낀 물건을 햇살에 드러내듯이 외면하고 모른척 했던 관객들 각자의 내면속 죽음을 자연스럽게 끄집어 낸다. 그리고 그것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죽음을 이해할 때 삶이 더 충만해 진다고 속삭인다.
벤자민은 영화를 직접 이끌어 나간다. 그의 나레이션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착각을 일으키고 나로 하여금 환타지를 현실로 오인케 하곤 했다. 그의 시선은 종종 카메라와 하나가 되어 세상을 비춘다. 이 기법으로 인해 나는 벤자민과 쉽게 동일시 된다. 그리하여 벤자민처럼 놀라운 사건 앞에서도 담담하게, 도인같은 태도로, 삶 전체를 '지켜보는 자'로 드라마속에 남을 수 있었다.
벤자민의 존재는 순행하는 나머지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무상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점점 젊어지는 벤자민이 있기에 늙어가는 사람들의 무상이 더 절절히 보이는 것이다. 그는 양로원에서 죽어 사라지는 노인들을 늘상 봐야 했다. 함께 했던 소중한 사람들이 자고 일어나면 사라졌다. 죽음, 이별이 습관이 되고..... 어린나이로 슬픔을 감내하는 그가 애처롭다. 그런 경험들이 그를 도인같은 면모를 띄게 만들었을 터.
벤자민은 얼굴에서 주름이 줄어들고 휠체어에서 일어나 걷게 되면서 양로원을 떠나야 했다. 인생의 스승인 예인선 선장과 함께 선원으로 세계 여러곳을 돌아다니면서 경험했던 일들을 데이지에게 엽서로 전해 준다. 심지어 사랑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도. 늙어가는 데이지와 젊어지는 벤자민이 재회했을 때가 둘의 인생 절정기가 교차하는 순간이다. 서로 깊이 사랑하면서도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겉돌던 그들이 적절한 시기에 제대로 만나 사랑을 나눈다. 적당히 늙은 데이지, 알맞게 젊어진 벤자민은 누가봐도 환상의 커플이다. 데이지가 더 늙기전, 벤자민이 더 젊어지기전 이 싱싱한 찰나를 놓칠 순 없다. 지극히 아름다워서 슬픔이 넘치는 사랑.
태어난 딸을 위해 모든 재산을 정리하는 벤자민은 착잡하다. 딸은 점점 자라고 자신은 점점 젊어질 것이다. 데이지가 나이 어린 딸, 그리고 젊어진 자신을 돌본다는 건 가혹하다. 딸은 젊어지는 아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정신적인 충격에 빠질 것이다. 정상적인 아빠를 만나야 딸의 장래도 순탄할 것이다. 벤자민은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두고 인도로 떠난다.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데이지를 찾아 왔을 때, 이번엔 딸과 벤자민이 같은 또래다. 딸곁엔 좋은 아버지도 있다. 벤자민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벤자민이 돌아온 이유도, 가족 몰래 벤자민의 숙소로 숨어든 데이지도 사랑때문이었으리라. 방향이 다른 각자의 세월이 흘렀지만 사랑은 그대로 였다. 중년의 여자와 아들벌 되는 남자가 몸을 섞는다. 관계후 황급히 옷을 입는 데이지, 속옷 사이로 삐져 나온 그녀의 처진 살들에 벤자민의 시선이 꽂힌다. 최고의 무용수 였던 데이지의 아름답던 몸은 사라지고 없다. 다시 이별.
할머니가 된 데이지는 어느 날 보건당국에서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어떤 아이가 양로원으로 찾아와 데이지의 이름만 되내이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화 앞부분, 할머니한테 피아노를 배우던 늙은 베자민의 모습 그대로 꼬맹이 하나가 피아노 건반을 반복해서 누르고 있다. 그 아이는 점점 치매가 심해지면서 양로원 사람들을 괴롭힌다. 데이지와 벤자민이 첨 만났던 장소에서, 각자의 인생 끝자락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앞서 말했듯 간난아기 베자민은 할머니 데이지의 품에서 죽는다.
시간의 흐름과 반대로 살아도 무상하긴 마찬가지고,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영화는 첨부터 끝까지 무상의 여러 측면과 무상의 극한인 죽음을 반복등장 시켜 끝날때까지 관객의 집중을 유지한다. 사람들의 죽음, 벤자민 엄마,아버지의 죽음, 벤자민을 길러준 흑인 엄마의 죽음, 선장의 죽음....혹자는 이런 면들 때문에 삶의 허무, 염세에 빠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영화가 말하려 했던 건 그 반대다. 무상하기에 순간순간을 사력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1분후 죽을지 1시간 후 죽을 지 아무도 모른다. 내일이 내게 온다는 보장은 없다. 삶이란 그런 거다. 무상하기 때문에 더 아름답고 매순간이 소중할 수 밖에 없는. 이 무상한 삶속에도 영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며, 영화가 말하려 했던 종착역이다.
만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당 영화를 봤다면 연인 혹은 배우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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