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회원가입 비번찾기 인증메일재발송
     
 
총 게시물 3,652건, 최근 0 건
   
[문학] 임태주 시인 어머니의 편지
글쓴이 :  태균                   날짜 : 2015-03-27 (금) 22:08 조회 : 15854 추천 : 6 비추천 : 0
태균 기자 (태기자)
기자생활 : 2,500일째
뽕수치 : 2,710뽕 / 레벨 : 0렙
트위터 :
페이스북 :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 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애미를 용서하거라.

부박하기 그지없다.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 날은 해가 나고, 맑구나 싶은 날은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애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 줄 것이다. 별 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니 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일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티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대로 순순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본 기사는 펌질을 금한다 (펌질은 아래 퍼나르기 소스만 허용되며 박스 클릭하면 전체선택된다)

후원계좌
<우리은행 : 1002-884-004842>
글쓴이 :  태균                   날짜 : 2015-03-27 (금) 22:08 조회 : 15854 추천 : 6 비추천 : 0

 
 
[1/5]   태균 2015-03-27 (금) 22:11
본문 중 아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군요 ..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2/5]   라임 2015-03-28 (토) 22:37
맘이 따땃하지는 편지~ 현명하신 어머니



 
 
[3/5]   팔할이바람 2015-03-29 (일) 14:21
글쟁이캐스퍼펜/

본글에서...
"부박하기 그지없다." <-- 이게 먼뜻이냐?
 
 
[4/5]   캐스퍼펜 2015-07-14 (화) 17:07
팔할이바람/

이걸 이제 봤네 ㅋㅋㅋㅋㅋ

부박하다(浮薄--) : 천박하고 경솔하다.
그지없다 :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부박하기 그지없다 : 천박하고 경솔하기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사전에 다 나와 있는데...
 
 
[5/5]   라임 2015-07-14 (화) 21:53
오늘 다시 읽어 보니 어머님이 우주를 품고 사신 듯~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출처] 디어뉴스 - http://www.dearnews.net/bbs/board.php?bo_table=B02&wr_id=35547
   

총 게시물 3,652건, 최근 0 건
번호 사진 제목 글쓴이 점수 조회 날짜
문예, 과학 게시판 안내  미래지향 2 29452 2013
09-17
 노무현 대통령님의 글쓰기 지침 [22]  팔할이바람 30 62649 2014
01-15
3652  '자유' 에 대해 [2]  지여 3 130 11-16
3651  자서전 - 만각과 마광수 [4]  지여 5 162 11-12
3650  革 혁 - 가죽 [9]  지여 8 230 10-18
3649  I am who I am [2]  지여 4 206 10-13
3648  유시민의 솔직과 도올의 겸손 [4]  지여 3 241 10-07
3647 슈바이처, 아인슈타인, 뉴튼  지여 2 197 09-18
3646 까라마꼬추의 형제들 [3]  박봉추 2 288 09-15
3645  방랑자 [4]  지여 3 358 08-30
3644 지성과 교양은 학벌과 무관하다 [3]  지여 3 432 07-31
3643 메타인지 - 착각퀴즈 [5]  지여 2 614 06-29
3642 메타인지 [3]  지여 6 556 06-28
3641 노무현과 슈바이처 [4]  지여 4 567 06-24
3640 코로나 치료제: 덱사메타존 [10]  팔할이바람 4 790 06-17
3639  그리울 때 낭송하는 네편의 시 [3]  지여 7 634 06-07
3638  항체 치료제 동물실험 성공 [3]  팔할이바람 7 749 06-03
3637 세계 제약사가 백신에 매달리는 이유 [4]  팔할이바람 4 744 05-18
3636  녹십자, 코로나 치료제 무상공급 발표 [3]  팔할이바람 3 758 05-18
3635  아베 간 [4]  팔할이바람 5 725 05-11
3634  의료용 면봉 [4]  팔할이바람 6 875 04-24
3633  한국만 살아 남을 거라는 증거 [6]  팔할이바람 6 992 04-21
3632  코로나 항체후보군 압축 [14]  팔할이바람 7 1009 04-14
3631  별 헤는 밤 [5]  지여 4 814 04-08
3630 수염 난 심장, 땡크에게... [4]  박봉추 4 879 04-08
3629  코로나: 구충제 효과 [3]  팔할이바람 3 847 04-07
3628 수학적 기법을 사용한 코로나 예측 [4]  팔할이바람 4 931 04-02
3627 작가 유시민과 독자 노무현 [6]  지여 5 838 03-27
3626 코로나: 클로로퀸에 대하여 [5]  팔할이바람 5 938 03-20
3625 시인 강은교에게 바치는 오뎅국물 [2]  박봉추 3 866 03-18
3624 책소개: 반일한국이라는 환상 [3]  팔할이바람 4 928 03-09
3623  심상정에게: 갚으까? [9]  박봉추 4 1027 03-04
3622  음악가 [10]  박봉추 5 992 03-02
3621 시인 [1]  박봉추 2 875 03-01
3620 [4]  박봉추 3 864 02-29
3619 뜬금영어: Hope vs. Wish [5]  팔할이바람 4 912 02-28
3618 노암촘스키의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1]  지여 4 864 02-25
3617 빵즈의 어원 [2]  팔할이바람 3 945 02-24
3616 줄기세포 일본학계의 조급증 [7]  팔할이바람 5 952 02-20
3615 한국형 정지궤도 위성성공 의미 [4]  팔할이바람 6 978 02-19
3614 신사따라 일본여행 제작기製作記16-부록(5단異說2… [11]  길벗 2 914 02-05
3613 신사따라 일본여행 제작기製作記15-부록(5단異說)  길벗 2 553 02-05
3612 신사따라 일본여행 제작기製作記14-야먀토  길벗 2 538 02-04
3611  코로나 바이러스 유전자 분석완료 [3]  팔할이바람 8 940 02-04
3610 신사따라 일본여행 제작기製作記13-엑셀파일下 [1]  길벗 3 843 02-03
3609 신사따라 일본여행 제작기製作記12-엑셀파일上  길벗 2 606 02-03
3608  신사따라 일본여행 제작기製作記11-부록(4단異說) [3]  길벗 1 844 02-02
3607 신사따라 일본여행 제작기製作記10-부록(10단해설…  길벗 2 556 01-31
3606 신사따라 일본여행 제작기製作記(9)부록(4단해설) [3]  길벗 2 888 01-30
3605 신사따라 일본여행 제작기製作記(8) ★신대기(하) [3]  길벗 1 898 01-30
3604 신사따라 일본여행 제작기製作記(7) ★신대기(상) [4]  길벗 1 948 01-30
3603 신사따라 일본여행 제작기製作記(6) 시마네현과 … [11]  길벗 4 976 01-28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추미애
 (장엄 심벌즈) 리허설 2
 (배꼽 엉치뼈) 리허설 1
 칭찬, 기분좋은 소식
 주관의 객관화, 객관의 주관화
 가방끈, 까방권
 '자유' 에 대해
 쫄, 쪽, 쫀, 뻥, 뽕
 정성호 예결 위원장 나이값좀 …
 비어칠1호점의 성공 후기
 자서전 - 만각과 마광수
 노무현이 이낙연(민주당)에게 …
 회비
 띠동갑 - 2女 3男
 이낙연은 홍영표의 실수를 반…
 3大조폭 30년 & 윤석 30년
 감꽃, 아더에게 보내는 초대장
 오세훈
 지방 선거 전당원 투표
 항룡이 사는 곳 안개 걷힌 어…
<사진영상>
도서관 ▼
세계사 ▼
한국사 ▼
미술 ▼
철학 ▼
문학 ▼
인문사회과학 ▼
자연응용과학 ▼
 
 
 
ⓒ 2013 디어뉴스 dearnewsnet@gmail.com ㅣ 개인정보취급방침 ㅣ 회원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