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회원가입 비번찾기 인증메일재발송
     
 
총 게시물 3,682건, 최근 0 건
   
[문학] 임태주 시인 어머니의 편지
글쓴이 :  태균                   날짜 : 2015-03-27 (금) 22:08 조회 : 12620 추천 : 6 비추천 : 0
태균 기자 (태기자)
기자생활 : 1,786일째
뽕수치 : 2,743뽕 / 레벨 : 0렙
트위터 :
페이스북 :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 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애미를 용서하거라.

부박하기 그지없다.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 날은 해가 나고, 맑구나 싶은 날은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애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 줄 것이다. 별 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니 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일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티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대로 순순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본 기사는 펌질을 금한다 (펌질은 아래 퍼나르기 소스만 허용되며 박스 클릭하면 전체선택된다)

후원계좌
<우리은행 : 1002-884-004842>
글쓴이 :  태균                   날짜 : 2015-03-27 (금) 22:08 조회 : 12620 추천 : 6 비추천 : 0

 
 
[1/5]   태균 2015-03-27 (금) 22:11
본문 중 아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군요 ..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2/5]   라임 2015-03-28 (토) 22:37
맘이 따땃하지는 편지~ 현명하신 어머니



 
 
[3/5]   팔할이바람 2015-03-29 (일) 14:21
글쟁이캐스퍼펜/

본글에서...
"부박하기 그지없다." <-- 이게 먼뜻이냐?
 
 
[4/5]   캐스퍼펜 2015-07-14 (화) 17:07
팔할이바람/

이걸 이제 봤네 ㅋㅋㅋㅋㅋ

부박하다(浮薄--) : 천박하고 경솔하다.
그지없다 :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부박하기 그지없다 : 천박하고 경솔하기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사전에 다 나와 있는데...
 
 
[5/5]   라임 2015-07-14 (화) 21:53
오늘 다시 읽어 보니 어머님이 우주를 품고 사신 듯~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출처] 디어뉴스 - http://www.dearnews.net/bbs/board.php?bo_table=B02&wr_id=35547
   

총 게시물 3,682건, 최근 0 건
번호 사진 제목 글쓴이 점수 조회 날짜
문예, 과학 게시판 안내  미래지향 2 26857 2013
09-17
 노무현 대통령님의 글쓰기 지침 [21]  팔할이바람 30 57297 2014
01-15
3682 오래전에 일본에 간 한반도인 [2]  팔할이바람 5 143 11-30
3681  유전자도 양보다 질 [16]  팔할이바람 3 193 11-30
3680  양성의 뇌회로 [4]  팔할이바람 3 195 11-11
3679 성(sex)에 대하여 [6]  팔할이바람 4 254 11-10
3678 마광수/ 한국의 현실과 위선적 권위주의 [2]  팔할이바람 4 206 10-30
3677 식생활에 의한 장내세균의 변화 [2]  팔할이바람 6 232 10-29
3676  GNU: 마음있는 컴뮤니케이션 [2]  팔할이바람 5 212 10-29
3675 진화와 진보 [4]  지여 4 219 10-19
3674 가을이 왔다 서(序) [1]  술기 4 273 09-18
3673 실천과 이론  지여 3 239 08-29
3672 가야방 금강  술기 3 314 06-29
3671 스님과 대통령  술기 4 534 05-28
3670 인생길. [2]  순수 3 539 05-28
3669 진보와 진화 / 발전과 성장  지여 6 548 05-20
3668 서울대미술관소장품 100선 2 [2]  뭉크 5 474 05-06
3667 서울대미술관 소장품100선 1 [3]  뭉크 5 454 05-06
3666 4월 27일생에 대한 노래 한편  술기 3 427 04-27
3665  얼음 방울 [4]  순수 7 564 04-14
3664 김정은 위원장에게 전하겠다 [2]  술기 5 695 04-06
3663 너와 나 [9]  순수 3 668 04-02
3662  큰꽃으아리 씨방 [3]  순수 6 1148 03-02
3661  무명 [7]  술기 6 1065 02-21
3660 김아랑의 노랑리본 [2]  지여 8 1090 02-20
3659 봄이 오는 소리 [1]  순수 5 774 02-17
3658 詩 - 현송월 [3]  지여 4 739 02-15
3657 얼음 이끼 꽃 [4]  순수 3 734 02-06
3656 에르미타시 박물관전 2  뭉크 3 1179 01-31
3655 에르미타시 박물관전 1  뭉크 3 2236 01-31
3654 [3]  술기 3 810 01-17
3653 시 한편 더 [1]  지여 5 944 2017
12-08
3652 현대미술관에서 / 써니 킴  뭉크 5 654 2017
12-06
3651 현대미술관에서 1  뭉크 5 644 2017
12-06
3650 자작시 한편 [2]  지여 8 1076 2017
11-20
3649 마광수 박사를 기리며 [1]  팔할이바람 13 1326 2017
11-07
3648  [신 암치료법] 카티 [5]  팔할이바람 9 1403 2017
10-28
3647 원죄  술기 8 1301 2017
09-15
3646 씨잘데기 없는 책들2- 제4차 산업혁명 [2]  아더 7 1259 2017
08-23
3645 블라맹크전시회 [3]  뭉크 3 1120 2017
08-18
3644 이집트초현실주의자들  뭉크 4 822 2017
08-18
3643 수학(5) - 퀴즈 [1]  지여 3 1270 2017
08-14
3642 수학 네번째 이야기-갈비뼈 기독교 [4]  지여 3 1467 2017
08-11
3641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명림답부 3 992 2017
08-10
3640 창조론 사이시옷 [3]  술기 2 1421 2017
08-04
3639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기차역' [2]  지여 3 1213 2017
08-01
3638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詩- 공짜 없다  지여 3 885 2017
08-01
3637  통섭 [7]  아더 8 1539 2017
07-19
3636  줄기세포 회사: Celltex [6]  팔할이바람 9 2184 2017
07-18
3635 수학-세번째 이야기(피타고라스와 스티븐 호킹) [2]  지여 6 1481 2017
07-14
3634 오에 히카리(음악)와 오에 겐자부로(문학)  지여 5 1158 2017
07-06
3633 詩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  피안 7 1477 2017
07-03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빌게이츠가 추천하는 도서 5권
 EBS 방송 수능 강의가 악의 원…
 타짜2 신세경 명장면.gif
 [알고갑시다] 일본사람들이 마…
 봉추 포레스트, 아침 커피를 …
 연동형? 독일식정당명부비례대…
 중국제조 2025와 화웨이 부회…
 영화볼때 민폐갑
 뉴스 거꾸로 뒤집어 속살보기
 웬만한남자들은 볼수없는 여자…
 어머니의 눈물
 정찬형 YTN 노종면 힘!!!
 파와하라
 드루킹이라면 양승태에게 몇 …
 성탄절 동네행진
 검찰, 이재명 부인 김혜경 4일…
 조응천
 논현동 주차장, 에쿠스가 초라…
 간절함 간절함
 언론을 바꾸어야 한다
<사진영상>
도서관 ▼
세계사 ▼
한국사 ▼
미술 ▼
철학 ▼
문학 ▼
인문사회과학 ▼
자연응용과학 ▼
 
 
 
ⓒ 2013 디어뉴스 dearnewsnet@gmail.com ㅣ 개인정보취급방침 ㅣ 회원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