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회원가입 비번찾기 인증메일재발송
     
 
총 게시물 3,670건, 최근 0 건
   
[문학] 임태주 시인 어머니의 편지
글쓴이 :  태균                   날짜 : 2015-03-27 (금) 22:08 조회 : 11619 추천 : 6 비추천 : 0
태균 기자 (태기자)
기자생활 : 1,611일째
뽕수치 : 2,743뽕 / 레벨 : 0렙
트위터 :
페이스북 :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 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애미를 용서하거라.

부박하기 그지없다.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 날은 해가 나고, 맑구나 싶은 날은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애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 줄 것이다. 별 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니 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일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티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대로 순순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본 기사는 펌질을 금한다 (펌질은 아래 퍼나르기 소스만 허용되며 박스 클릭하면 전체선택된다)

후원계좌
<우리은행 : 1002-884-004842>
글쓴이 :  태균                   날짜 : 2015-03-27 (금) 22:08 조회 : 11619 추천 : 6 비추천 : 0

 
 
[1/5]   태균 2015-03-27 (금) 22:11
본문 중 아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군요 ..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2/5]   라임 2015-03-28 (토) 22:37
맘이 따땃하지는 편지~ 현명하신 어머니



 
 
[3/5]   팔할이바람 2015-03-29 (일) 14:21
글쟁이캐스퍼펜/

본글에서...
"부박하기 그지없다." <-- 이게 먼뜻이냐?
 
 
[4/5]   캐스퍼펜 2015-07-14 (화) 17:07
팔할이바람/

이걸 이제 봤네 ㅋㅋㅋㅋㅋ

부박하다(浮薄--) : 천박하고 경솔하다.
그지없다 :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부박하기 그지없다 : 천박하고 경솔하기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사전에 다 나와 있는데...
 
 
[5/5]   라임 2015-07-14 (화) 21:53
오늘 다시 읽어 보니 어머님이 우주를 품고 사신 듯~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출처] 디어뉴스 - http://www.dearnews.net/bbs/board.php?bo_table=B02&wr_id=35547
   

총 게시물 3,670건, 최근 0 건
번호 사진 제목 글쓴이 점수 조회 날짜
문예, 과학 게시판 안내  미래지향 2 26581 2013
09-17
 노무현 대통령님의 글쓰기 지침 [21]  팔할이바람 30 56524 2014
01-15
3670 스님과 대통령  술기 3 144 05-28
3669 인생길. [2]  순수 2 112 05-28
3668 진보와 진화 / 발전과 성장  지여 4 178 05-20
3667 서울대미술관소장품 100선 2 [2]  뭉크 5 130 05-06
3666 서울대미술관 소장품100선 1 [3]  뭉크 5 147 05-06
3665 4월 27일생에 대한 노래 한편  술기 3 186 04-27
3664 얼음 방울 [2]  순수 6 225 04-14
3663 김정은 위원장에게 전하겠다 [2]  술기 5 345 04-06
3662 너와 나 [9]  순수 3 311 04-02
3661  큰꽃으아리 씨방 [3]  순수 6 513 03-02
3660  무명 [7]  술기 6 512 02-21
3659 김아랑의 노랑리본 [2]  지여 8 529 02-20
3658 봄이 오는 소리 [1]  순수 5 441 02-17
3657 詩 - 현송월 [3]  지여 4 397 02-15
3656 얼음 이끼 꽃 [4]  순수 3 393 02-06
3655 에르미타시 박물관전 2  뭉크 3 907 01-31
3654 에르미타시 박물관전 1  뭉크 3 1912 01-31
3653 [3]  술기 3 483 01-17
3652 시 한편 더 [1]  지여 5 575 2017
12-08
3651 현대미술관에서 / 써니 킴  뭉크 5 398 2017
12-06
3650 현대미술관에서 1  뭉크 5 385 2017
12-06
3649 자작시 한편 [2]  지여 8 677 2017
11-20
3648 마광수 박사를 기리며 [1]  팔할이바람 13 869 2017
11-07
3647  [신 암치료법] 카티 [5]  팔할이바람 9 967 2017
10-28
3646 원죄  술기 8 798 2017
09-15
3645 씨잘데기 없는 책들2- 제4차 산업혁명 [2]  아더 7 919 2017
08-23
3644 블라맹크전시회 [3]  뭉크 3 802 2017
08-18
3643 이집트초현실주의자들  뭉크 4 572 2017
08-18
3642 수학(5) - 퀴즈 [1]  지여 3 912 2017
08-14
3641 수학 네번째 이야기-갈비뼈 기독교 [4]  지여 3 1032 2017
08-11
3640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명림답부 3 726 2017
08-10
3639 창조론 사이시옷 [3]  술기 2 1022 2017
08-04
3638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기차역' [2]  지여 3 888 2017
08-01
3637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詩- 공짜 없다  지여 3 606 2017
08-01
3636  통섭 [7]  아더 8 1172 2017
07-19
3635  줄기세포 회사: Celltex [6]  팔할이바람 9 1457 2017
07-18
3634 수학-세번째 이야기(피타고라스와 스티븐 호킹) [2]  지여 6 1119 2017
07-14
3633 오에 히카리(음악)와 오에 겐자부로(문학)  지여 5 828 2017
07-06
3632 詩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  피안 7 1104 2017
07-03
3631 딸을 살해한 어머니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 [5]  심플 4 1222 2017
07-03
3630 아버지의 뒷모습 [2]  술기 7 1307 2017
06-19
3629 더플랜 k값 - 1.5 어쩌면? [3]  지여 3 1245 2017
06-13
3628 UGLY AS ART /서울대미술관 [1]  뭉크 1 1183 2017
06-09
3627 호림박물관 [3]  뭉크 4 1266 2017
06-03
3626  수학- 두번째 이야기(천경자 미인도) [4]  지여 5 1379 2017
05-28
3625 화가 송번수 50년의 무언극 [2]  뭉크 4 1487 2017
05-26
3624 8주기 노무현 대통령 추모시 [3]  피안 8 1396 2017
05-23
3623 페니키아 알파벳 [2]  피안 5 1546 2017
05-21
3622 세상을 바꾼 질문들 [1]  아더 2 1321 2017
05-20
3621 노무현 입니다 [2]  바다반2 3 1266 2017
05-19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야구팬의 잠금화면
 금융위는 삼성바이오로직스를 …
 10년째 안팔리고 있다.
 이해찬을 불러내라
 브라질 예수상에서 한 컷
 운석으로 만든 권총
 벌금 70만원, 탁현민에게 저작…
 소리 없는 바람
 정치 신세계
 자유당 대변인 클래스
 봉추 횽아를 비롯 몇 몇 횽아…
 모짜버거 후기
 2800만원 들여 튜닝한 모닝
 김명수 대법원장님 결단하세요
 순간 멈칫
 물가도 세금이다
 방청소가 오래 걸리는 이유.jp…
 프로야구 암흑기
 조별과제 대참사
 유재석의 광희 활용법.jpg
<사진영상>
도서관 ▼
세계사 ▼
한국사 ▼
미술 ▼
철학 ▼
문학 ▼
인문사회과학 ▼
자연응용과학 ▼
 
 
 
ⓒ 2013 디어뉴스 dearnewsnet@gmail.com ㅣ 개인정보취급방침 ㅣ 회원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