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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전쟁 -
태산건설과 다이세이건설 두 업체 중에서 꼬따바루 프로젝트를 맡게 될 업체를 선정하는 입찰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발주처와 태산건설, 그리고 다이세이건설 3자는 예전에 다이세이가 제출했던 수의계약 방식의 제안서(Proposal)를 완전히 무효화하고 양사의 동시 경쟁 입찰 방식으로 시공업체를 선정하는데 합의했다. 보통의 경우 경쟁 입찰이 P/Q (사전 자격심사)를 통과한 10여개 업체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것을 감안하면 미리 50%의 가능성을 확보하고 입찰에 임하는 두 업체로서는 아주 특별한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김인철은 100%의 가능성을 원했고 황태산이라는 인물로 인하여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최근 들어 일본 업체는 해외 건설공사의 노하우와 가격 경쟁력에서 이미 한국 업체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김인철이 처음부터 다른 한국 업체의 참여 가능성에 못을 박은 이유도 한국 업체 간의 경쟁만 아니라면 충분히 해볼만하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태산 건설 관계자 뿐 아니라 발주처의 직원들, 심지어는 다이세이 건설의 직원들조차도 태산건설이 승리자가 되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정해진 날짜까지 두 업체가 입찰서를 제출하면 그 중 가격이 낮은 업체가 우선 협상자로 지정된다. 우선협상자가 정해지면 그 업체를 대상으로 공법, 가격 산정의 건전성 및 타당성, 견적 조건 등을 놓고 심사에 들어간다.
더 높은 가격을 써낸 업체에 기회가 돌아가는 경우는 우선협상자가 심사 결과 결정적인 하자로 인하여 탈락하는 경우에 한한다. 그러므로 입찰시 경쟁자 보다 낮은 가격을 써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지만 이익을 남길 수 있는 가격이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김인철이나 황태산은 다이세이가 그들보다 낮은 가격을 써 낼 수는 없다고 믿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적자를 각오해야 할 것이었다.
드디어 입찰서 제출 마감 날, 태산건설 측에서는 진즉에 견적을 마쳤으나 마감 날까지 기다렸다가 마감 당일 날 일과 시간이 끝나갈 즈음에 산더미 같은 분량의 입찰서류를 비만또로 사에 제출했다.
그들은 입찰서를 제출한 후 이틀 후에 있을 결과 발표를 기다렸다. 태산건설 소속의 사람치고 속으로야 피가 마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모두를 겉으로는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결과에 대한 확신이 없는 듯한 태도를 남에게 보인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다.
이틀 후 발표 날이 되자 비만또로 사는 입찰결과 대신 결과 발표를 3일간 더 연기한다는 내용의 통지문을 보내왔다.
남은 3일간 김인철은 날마다 혼자서 운동(골프)을 나갔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예감 때문에 극도로 날카로워진 신경을 달래는 데는 골프가 크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초조해하는 그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밤방에게 전화를 하여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예의도 아니거니와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닷새째 되는 날 그는 혼자서 골프를 치다가 헨니로부터 전화로 결과를 전해 들었다.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다이세이 측이 더 낮은 가격을 써내어 우선 협상업체로 지정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헨니에게 전원 회의를 소집하라고 지시하고 즉시 사무실로 향했다.
김인철이 들어섰을 때 회의실은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침통한 표정을 한 채 할 말을 잊고 있었다.
김인철이 들어서며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말했다.
“뭔가 잘못되었어.”
그 말에 황태산이 가까스로 대답했다.
“도무지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가 가격에서 질 수는 없는 일인데......... 저쪽의 입찰서류를 한번 봤으면 좋겠군요.”
“회장님, 우리가 실수한 것은 없겠지요? 계산을 잘못했다거나..........”
“그럴 리 없습니다. 열 번도 넘게 검토한 것인데요.”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확실합니까?”
“절대로 우리 쪽의 실수는 없습니다.”
“우리 가격은 여유가 있습니까?”
“그 이하로 수주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가격입니다. 시공 중에 우리가 우리의 능력으로 추가로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여지는 있지만 현재로서는 절대 마진 10%를 넣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이세이가 밑지는 가격을 제시한 것입니까?”
“써낸 가격대로라면 그렇다고 봐야합니다.”
“금액 차이가 53억 불 중에 겨우 51만 불이라니......., 우리입찰서자료가 경쟁업체로 넘어가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결과가.........”
“우리 쪽에서는 유출되지 않았습니다. 제 목숨을 걸겠습니다.”
흥분으로 붉어진 황태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인철은 생각난 듯 테이블 위 키폰의 송수화기를 들고 헨니의 자리 번호인 3번을 눌렀다.
“헨니입니다.”
“지금 당장 피터와 연결해 줘요.”
“예, 연결해 보겠습니다. 끊고 기다리세요.”
“아니, 그냥 기다리지.”
그가 수화기를 든 채로 삼분 쯤 기다린 후에 헨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터씨는 회의 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리비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보스에게 보고할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연결해 드릴까요.”
“연결해.”
즉시 라인에 리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헬로우, 보스?”
“리비? 나 김이야. 뭔지 말해봐.”
“보스, 다이세이의 입찰서가 당일 날 들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하루 늦게 들어왔답니다.”
“그걸 발주처에서 용인을 했다는 말인가?”
“다이세이 지사장이 당일 날 에르윈씨에게 양해를 구했다고 합니다. 그날 피터씨가 안된다고 강력히 항의하여 승강이를 벌였는데 결국 에르윈씨가 밤방씨의 허락을 얻어내었다고 합니다.”
“그럼 하루 동안 우리 입찰서는 누가 보관하고 있었는지 알아봤나?”
“제가 담당직원에게 알아본 바에 의하면 에르윈 씨의 방에 보관되었다고 합니다.”
“방 열쇠는 에르윈이 가지고 있고?”
“물론입니다. 제가 알았더라면 진작 연락을 드렸을 텐데 저는 마침 그때 감리업체 사무실에 갔었고 회사에 돌아오니 모두 퇴근한 뒤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 리비는 잘못한 것이 없어. 지금 말하는 내용으로도 상을 받을 일이야. 그런데 리비도 그날 밤에 우리 입찰서의 내용이 다이세이측에 누출되었을 거라고 짐작하는 군. 안 그래?”
“확신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뭔가?”
“다이세이 측은 최근 견적에 거의 손을 놓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야마모토씨는 뻔질나게 찾아와서 에르윈씨와 독대를 하였고........, 그리고 기술적인 내용은 잘 모르는 저로서도 두 회사 간의 입찰 금액 격차가 그렇게 근소한 것을 우연으로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마워 리비, 계속 수고해줘.”
김인철은 송수화기를 내려놓은 후 황태산을 바라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찌된 일인지 이해가 되는군요. 그런데 다이세이로서는 하라고 해도 못 할 가격에 덜컥 수주부터 한 셈인데,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군.”
“만일 내가 밑질 것이 분명한 가격에 공사수주를 했다면 두 가지 경우일 것입니다. 하나는 힘 있는 내부자의 협조가 있는 경우입니다. 그런 경우 일단 수주를 하고 나서 나중에 시공하면서 공사 금액을 계속해서 올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가격제안서에 나중에 돈을 더 받아낼 수 있는 함정을 만들어놓은 경우입니다.”
“힘 있는 내부자라면.........? 에르윈 이로군. 에르윈을 믿고 밑질 가격에 계약을 한다? 소심한 일본 놈들이 그것만 가지고 모험을 할 리는 없고........ 두 가지 다라고 봐야겠군요. 그렇다면 일단 제안서에 함정이 있을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회의실에 도착했을 때 숯처럼 검은 색이던 김인철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자, 여러 가지 드러난 사실로 볼 때 실망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결과를 뒤집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세부 심사에 통과한다고 해도 계약 시까진 물리적으로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립니다. 비리가 있다면 밝혀내는데 충분한 시간입니다. 제가 일단 피터를 통해서 저쪽의 입찰서를 빼 올 테니 회장님은 김이사, 박부장과 함께 제안서 내의 독소조항들을 찾아내십시오. 그리고 승이사, 오차장은 사립 탐정이 좀 되어야겠소. 실력 있는 현지인들을 붙여줄 테니 에르윈을 따라붙어요. 분명히 다이세이와의 거래를 찾아낼 수 있을 거요. 완전한 증거를 찾아내기 전에는 발주처와의 어떠한 접촉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침묵, 무관심으로 나갑시다. 질문 있습니까?”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 낯빛은 다시 살아나 있었다.
약속장소인 호텔 커피숍에 먼저 와서 기다리던 김인철은 피터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용건을 말했다.
“피터, 다이세이의 입찰서가 하루 늦게 들어왔다는 얘기를 들었소. 당신이 용납할 수 없다며 에르윈과 실랑이를 했었다는 소리도 들었소. 고맙소.”
피터는 김인철을 만나는 것이 곤혹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저는 회사에서 제 직무를 한 것뿐입니다. 그 문제는 밤방씨가 허락하셨으므로 더 이상 문제가 안 됩니다.”
“문제가 안 되다니요? 하루 늦게 입찰서를 제출한 업체의 단가가 먼저 제출한 업체보다 0.01% 더 싼 가격에 들어왔는데 그게 정상입니까?”
“그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지요.”
“당신도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잖소?”
“증거가 없는 한 ..........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내가 알아서 하겠소. 당신은 한 가지만 해주면 됩니다. 다이세이의 입찰서를 우리가 검토해봐야겠습니다. 허점과 독소조항이 있을 거요. 그걸 우리가 찾아주겠습니다. 그걸 카피해서 나에게 넘겨주시오.”
“독소조항이 있다면 우리가 찾아낼 것입니다.”
“우리가 도와주겠소.”
“제가 그럴 수 없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제 권한 밖의 일입니다.”
“이미 입찰이 끝난 마당에 못줄 이유가 뭐요? 내가 그걸 원하는 이유도 말하지 않았소?”
“밤방씨의 지시 없이는 곤란합니다. 제가 밤방씨께 말씀드릴까요? 아니면 직접 말씀하시겠습니까?”
“나는 당신 선에서 회사를 위하는 마음으로 해 줄 것으로 생각했소. 밤방씨에게 꼭 말해야 한다면 내가 직접 하겠소.”
그는 피터가 달라졌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대세를 따르기로 했거나 다이세이에게 매수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는 이 사람은 이제 틀렸다고 생각했다. 리비를 떠올렸지만 고개를 저었다. 피터가 한다면 자기가 소속된 회사를 위해서 하는 것으로 문제될 것이 없지만 리비가 한다면 불법행위가 되는 것이고 그녀가 자료에 접근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그는 그녀에게 그런 일을 시킬 생각이 없었다.
김인철은 피터를 보내고 커피숍에 혼자 앉아서 이 문제로 밤방을 직접 만나야 할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넓은 유리창을 통해서 자카르타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수디르만가의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앉아있을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발신자는 헨니였다.
“보스, 리비가 보스를 만나야 한답니다. 꼭 직접만나야 한답니다.”
“그랜드호텔 커피숍에서 기다리겠네. 자네도 와서 저녁식사나 같이하지.”
“일곱 시 정도 되어야 도착할 수 있을 텐데요.”
“한 시간 정도 남았군, 기다리고 있겠네.”
한 시간이 지나서 헨니와 함께 온 리비가 김인철에게 내민 것은 손가락 반 토막 크기의 USB였다.
“이게 뭔가?”
“다이세이의 입찰자료 입니다.”
김인문과 헨니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알고 이걸.........?”
“필요할 것 같아서........ 제가 감리업체에 가서 몰래 복사했습니다.”
“너 그런 일은 안한다면서?”
헨니가 말했다.
“내가 스파이잖아. 이런 게 바로 스파이가 하는 일이지. 그 쪽에서 먼저 반칙을 했는데 당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나저나 이 자료가 도움이 좀 되어야 할 텐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눈을 내리깐 채로 말하는 리비에게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김인철이 말했다.
“헨니, 자카르타에서 최고로 맛있는 음식이 뭐지? 우리 지금 그걸 먹으러 가자구.”
“그런데 좀 이상한 일이 있어요, 입찰 부서의 친구들 말에 의하면 입찰 당일 날 입찰서를 제출하러 다이세이의 지사장 야마모토와 같이 왔던 사람들 중 하나는 한국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그 한국인과 야마모토가 준비해온 두 벌의 입찰서중 어느 것을 제출할 것인가를 두고 말다툼을 벌였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그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대요. 결국 그날 에르윈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두 개를 다 도로 가져가서 그 다음날 제출 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날은 그 사람이 오지 않았답니다.”
리비는 지금 자신이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 정보인지도 모르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들은 헨니의 제안에 따라 샥스핀 전문 중국 요리점으로 갔다.
유리꼬는 쇼핑몰 안에서 두 시간 가량이나 돌아다녔지만 막상 산 물건이라고는 브래지어 한 개가 전부였다. 태산 건설 오순근 차장은 얀또와 함께 쇼핑몰 안을 배회하며 참을성 있게 그녀를 따라 다녔다.
얀또는 승이사와 한조로 야마모토 쪽에 붙은 헨드라와 함께 인도네시아 정보국 소속의 요원이었다. 오순근은 현역 요원이 개인에게 고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지만 정작 얀또 본인은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알려질까 봐 걱정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는 영리하면서도 성실한 사람으로 이런 일에 경험이 없는 오순근을 잘 배려해 주었다.
중국계 현지인으로 보이기 위해서 며칠 동안 콧수염을 깎지 않고 기른 오순근은 입찰 팀의 막내로서 이번에 인도네시아에 온 것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태산건설이 입찰 후 우선 협상 대상에서 탈락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잠깐 동안 지옥을 맛보았지만 곧 이어진 수뇌부의 대처를 보고서는 다시금 확신을 회복했다. 좀 엉뚱한 임무를 수행하고는 있지만 그는 그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수주에 도움이 된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랴 싶었다.
그녀는 오래 걸어 다녀서 다리가 아픈 듯 오층에 있는 발마사지 집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간 지 오 분 쯤 지나서 두 사람도 발마사지나 받을 요량으로 그 곳에 들어갔다.
실내의 어두움에 적응하느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오순근은 깜짝 놀랐다. 승이사와 헨드라가 안마사에게 발을 맡긴 채 앉아서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승이사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2층 부부특실로 올라갔어.”
에르윈이 그녀의 집에 드나드는 것은 미행 첫날 알아낸 사실이고 그 이상의 진전이 없었는데 근 일주일을 따라다닌 끝에 오늘 드디어 야마모토와 유리꼬가 접선하는 장면을 잡아낸 것이었다.
그들이 함께 있는 사진은 얀또가 찍어오기로 했다.
얀또가 카운터 직원에게 다가가서 신분증 비슷한 것을 보여준 다음 그들이 마사지를 받고 있는 방 번호를 알아냈다. 그는 자기 집 거실을 걷듯 거침없이 202호실로 가서는 문을 벌컥 열었다. 실내에 있는 사람들이 미처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카메라 셔터를 연속으로 다섯 번 눌렀다. 그리고 다시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고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이제 이것으로 더 이상의 미행은 필요 없게 되었다. 밖으로 나온 네 사람은 서두르지 않고 걸어서 몰 안에 있는 한 패스트푸드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오순근은 김정수에게 전화를 하여 조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런데 통화를 거의 끝낼 무렵 배터리가 소진되어 전화가 끊어졌다. 통화를 계속하기 위해서 승이사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예 전화기가 없었다. 얀또가 자신의 것을 내밀었지만 그는 사양했다. 용건은 거의 다 전달했고 인사말 정도만 남겨놓은 상태였으므로 다시 통화를 할 필요는 없었다.
넷이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음료수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가 그곳에서 나올 때는 그들의 파트너가 서로 바뀌었다. 얀또와 헨드라는 더 볼일이 있다고 같이 나갔고 카메라를 챙긴 오순근은 승이사와 함께 차를 세워둔 지하주차장으로 갔다.
오순근과 승이사가 승용차의 운전석과 조수석에 각각 앉은 다음 오순근이 후진으로 차를 막 빼려는 순간 마이크로버스 한 대가 전속력으로 달려와서 앞을 가로막았다. 곧이어 열대여섯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차에서 뛰어내리더니 순식간에 그들의 차를 에워쌌다.
직감적으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 오순근이 이미 잠겨있는 도어 록을 다시 한 번 누름과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전화기폴더를 열었지만 그것은 조금 전에 이미 전원이 꺼진 것이었다.
차를 에워싼 무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두 사람에게 차에서 내리라는 손짓을 했다. 오순근이 계속해서 경적을 울렸으나 도와주러 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그중 하나가 들고 있던 쇠파이프로 그들이 타고 있는 승용차의 앞 유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유리창이 거미줄 모양으로 깨어졌다. 곧이어 쇠파이프는 운전석이 있는 차의 우측 유리를 강타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두 사람은 두 손을 들어 항복의사를 표시하고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이 내리자 그들은 차 열쇠를 뺏은 다음 파이프를 휘두르며 그들에게 자신들의 차에 타라고 했다.
잡혀갈 땐 가더라도 가능한 한 난동을 부리면서 시간을 끌어야한다는 생각을 한 오순근은 얌전하게 지시를 따르는 승이사를 버려두고 그를 움켜잡은 한 사람의 팔을 비틀어 뿌리친 다음 차들 사이로 달아났다. 지하주차장에서 숨바꼭질이 벌어졌다. 그러나 프로들을 상대로 그 숨바꼭질이 오래갈 수는 없었다.
칼을 뽑아 겨누면서 포위를 좁혀오는 사람들에게 잡히려는 찰나 총소리가 났다. 모두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정수와 얀또, 헨드라 그리고 오순근 으로서는 처음 보는 검고 구레나룻을 기른 얼굴의 사람이 거기 있었다. 권총을 뽑아들고 있는 사람은 구레나룻의 사내였다.
“그냥 물러가면 보내주겠다.”
총을 든 사내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들은 네 사람을 노려보면서 신중한 동작으로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쉽게 물러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너희들 총을 겁내지 않는구나.”
이 말과 동시에 사내는 그들 중 덩치가 가장 커 보이는 사람의 허벅지를 향해 한 발을 쐈다. 그는 다리를 꺾으며 쓰러졌고 그의 허벅지에서 흘러나온 피가 주차장 바닥을 적셨다.
그는 총구를 이리저리 돌리며 다시 소리쳤다.
“셋을 세기 전에 사라져라. 사라지지 않고 어정대는 놈은 철창신세를 져야한다. 그리고 내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놈은 골통에 총알을 박아 주겠다. 나는 너희 같은 놈들에 대한 살인면허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부상한 자를 부축하여 차에 태우고 물러갔다.
“아이고 십년감수했네. 김정수씨 고맙소. 어떻게 알고 위기일발의 순간에 나타났지?”
그들이 차를 타고 떠난 뒤 오순근이 아직도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인사들 나누세요. 소피얀씨 입니다. 인니 특수부대인 코파수스 현역중령입니다.”
김정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김정수와 함께 에르윈을 감시하던 그의 파트너 인드라가 야마모토의 전화를 받고 난 에르윈의 행동이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것은 막 김정수와 오순근 사이의 통화가 끝난 직후였다.
인드라는 에르윈이 오순근 일행을 잡기 위해서 폭력조직원들을 동원한다고 김정수에게 말했다. 김정수는 즉시 김인철에게 보고하는 한편 오순근에게는 그들이 데리러 올 때까지 사람이 많은 곳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얀또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전화하고 그 사실을 알릴 수 있었지만 알아내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얀또가 오순근들과 헤어진 후였다.
김정수와 인드라가 그곳으로 갔을 때 김인철의 긴급 호출을 받은 소피얀은 이미 도착해 얀또, 헨드라와 함께 있었다. 인드라는 주차장 출구를 봉쇄하고 나머지는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급조된 구출작전은 완전한 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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