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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관, 의리의 사나이-
김인철은 주인의 인상만큼이나 소박하고 부담 없는 분위기의 대기실 소파에서 40분이나 기다린 후에야 김도관에게 안내되었다. 그의 방에서 대기실 쪽으로 나온 사람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는 혼자 있으면서 일부러 김인철을 기다리게 한 것이었다. 사전에 시간 약속을 잡아놓은 터이라 의도는 더욱 분명했다. 일면식도 없는 김인철 개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측근 참모들에 대해 반감이 있다는 뜻이었다. 꺼리도 안 되는 사유로 행자부장관 자리에서 물러날 때 청와대의 대응에 불만이 있는지도 몰랐다.
감색 줄무늬 정장 조끼 차림의 그는 뚱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전혀 반가워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김인철은 어떤 의도였건 그가 일부러 자신을 기다리게 한 사실에 대해 무시하고 언짢은 내색을 조금도 나타내지 않았다. 상대방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자신의 반응이 깐깐한 상대와의 첫 대면에서 주도권을 가지는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는 김도관에 대한 호칭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숙고를 한 끝에 ‘김 장관님’, ‘김 전 장관님’, ‘위원장님’, 대신에 ‘김도관씨’로 부르기로 미리 정해 놓았다. 적당한 호칭이 없기도 했지만 자신이 그의 호의를 구하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설명하기 애매한 자신의 신분과 임무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사전에 생각해놓았다.
김인철은 그가 내민 손을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대통령을 외곽에서 비밀리에 지원하는 임무를 새로 맡은 김인철이라 합니다. 일을 시작한지 오늘이 4일째입니다. 대통령께서 권한 정지 중이라서 직책과 직함도 없고 어쩌면 제가 대통령의 의중을 받들어 일하는 것 자체가 불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제가 맡은 일의 효율성 때문에 당분간 저의 존재는 공개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이유로 당신께서 주위의 인물이 아니라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저를 발탁하신 것입니다. 물론 저는 김도관씨처럼 대통령께서 확실히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만 모습을 나타낼 것이고, 언젠가는 피하지 못할 노출의 시점을 최대한 늦출 것입니다. 저의 임무는 대통령의 의중을 실행자에게 전달하는 비공식 경로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조금도 예상치 못했을 김인철의 말에도 그는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이 대답했다.
“당신 임무에 대해선 그만하면 알겠소. 어쨌든 각하께서 친히 전화를 주셨으니 당신을 인정하겠소. 이 김도관이 에게 시키실 일이 있으면 그냥 부르시면 될 일인데 굳이 당신을 보낸 이유가 납득이 안 되기도 하지만 말이요. 무슨 일인지 들어나 봅시다.”
“그럴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조금 더 설명을 드리지요. 당신께서는 이번 탄핵을 계기로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국정운영을 하시겠다고 결심하신 듯합니다. 즉 당하고만 살지는 않겠다는 뜻이지요. 그러자면 지금까지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개입과 조정 또는 대통령의 성품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소위 공작이라는 것도 때로는 피할 수 없다고 보시는 거죠. 몇 가지 도덕적 원칙 하에서 말이죠. 그 원칙들은 ‘법을 위반하지 않을 것. 도덕적으로 정의로운 목적일 것, 행위 당사자의 자발적 동의와 주도적 역할에 의할 것’ 들입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추진하시고자 하는 일들 중에서 소위 공작의 범주에 들 만한 일은 당신의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 당사자의 판단과 결단에 의하여 추진여부가 결정되기를 바라십니다. 저의 역할은 일의 내용과 목적을 행위자에게 알려주고 그 일의 타당성과, 가능성, 추진방법, 위험부담 등에 대해서 대통령을 대신하여 행위 당사자와 정보를 교환하고 때론 토론도하여 의사 결정의 과정을 돕는 것입니다."
김도관은 뭔가 개운치 않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당신이 각하의 지시로 나를 찾아왔으니 지금 각하께서 나를 통해서 추진하시고자하는 일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각하께서 당신을 아무리 신뢰한다고 해도 어떻게 당신이 각하를 대신해서 의견조율이나 토론을 할 수 있겠소? 단순히 지시를 전달하는 거라면 몰라도......., 그리고 내가 각하를 직접대하지 못할 만큼 불편한 사이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뭐가 있겠소?”
틀린 말이 없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의 정책 결정에 지나치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역할을 축소해서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김도관의 날카로운 질문이 그렇게 넘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더 솔직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예, 딴은 그렇지요. 지금 김도관씨와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은 저의 아이디어이고 대통령님께는 대략적인 내용만 말씀드린 후 알아서 추진하도록 위임을 받은 상태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런 일은 당신께서 지금까지 해오시던 방식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또한 당신께서 아실필요도 없을 만큼 하찮으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김도관씨 같은 분이 저 같은 사람이 개입할 필요도 없이 알아서 해주는 정도가 된다면 참민정부가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대통령 주변에 악역을 맡을 사람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
“으음, 당신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없겠소. 그러나 적어도 이 김도관이는 뭐가 무서워서 몸을 사리는 사람은 아니요. 말해 보시오, 할 일이 뭔지?”
“이번 탄핵으로 우리가 잃은 것과 얻은 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잃은 게 뭐가 있소? 그놈들이 언제 각하를 대통령으로 인정한 적이 있기나 하오? 참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그놈들 패악 질이 국민 분노를 사서 역으로 우리에게 기회가 온 거 아닙니까?”
그는 고집스럽게 대통령을 꼭 '각하'라고 불렀다.
“우리라니요? 대통령? 참민정부? 개혁세력? 김도관씨와 보좌관들? 아니면 정대영?”
“그렇지. 정대영! 큰일 날 일이군. 내가 요 며칠 좋아 죽어야 할 판에 기분이 찜찜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것다. 그렇지, 그렇지. 죽 쒀서 개주게 생겼네.”
그는 커다란 진리를 깨달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김인철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를 풀어내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그는 설명을 듣는 김도관의 눈자위에 자리해 있던 그에 대한 반감이 말끔히 걷히고 그 대신 호감이 채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처음에는 어쩔 수 없는 경상도 억양에도 불구하고 단어만이라도 표준말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던 그의 말투가 나중에는 거리낌 없는 경상도 사투리로 바뀌는 것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약간 우둔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두뇌 회전이 매우 빨라서 끝까지 듣지 않고도 그의 생각을 이해하고 자신의 의견을 더했다. 그들은 서로 머릿속에 있는 꾀를 주고받으며 김인철이 처음에 세운 계획을 다듬어서 치밀하게 하였다. 그에 더하여 부분적으로 조금씩 빗나가는 경우의 대비책까지 준비할 수 있었다.
“글안해도 내 혼자 왠지 마음이 불안해 죽겄더라 아입니꺼? 정대영이가 당을 완전히 장악하는 건 끔찍한 일이제, 하모. 그 사람이 우리당 대선 후보가 되는 순간 우리 각하를 마지막으로 대가 끊기는 기라. 그리고 그 사람 전에는 벌로 봐서 잘 몰랐는데 가까이서 하는 행사를 보니께 힘만 있으면 우리 각하를 배신하고도 남을 사람이더만.”
“이번일로 김도관씨 본인이 입게 될지도 모를 정치적 상처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보셨나요?”
“내사 그런 계산은 잘 몬합니더. 국가와 각하를 위한일 아입니꺼? 그나저나 김선상 같은 사람이 각하 곁에 있어서 참말로 다행이요. 각하를 마이 도와주소.”
헤어질 때 그는 두꺼운 두 손으로 악수하자고 내밀은 그의 오른 손을 꽉 잡고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외롭다는 말이었다. 대통령을 위시해서 참민정부의 핵심인사들은 모두 외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민정부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김도관은 언론에서 묘사하듯 욕심 많고 무능하고 염치없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착하고 의롭고 능력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강한 동지애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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