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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임 -
김인철은 귀국즉시 대통령을 찾았다.
“어서 오시오, 이게 얼마 만이요?”
오랜만에 만나는 대통령은 반가움을 온몸으로 표시했다.
“독일과 영국을 다녀왔습니다만 사적인 일이어서 송구합니다.”
“법적으로는 사적인지 몰라도 김형이 청와대에 들어온 이후 움직이는 모든 일이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 거 알고 있소. 어디서 무엇을 하고 다니던 나한테 다 말할 필요 없고 필요한 것만 이야기하면 됩니다.”
“예, 독일에서 뜻하지 않게 메르켈 총리를 만났습니다. 사적인 용무로 만났던 슈나이더 외상이 청해서였습니다. 대통령님께 비공식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아, 그래요? 그게 뭡니까?”
“북한에 투자를 하고 싶어 합니다. 남북 경협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을 보고 자극받아 늦기 전에 발을 담그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첫 번째로 검토하고 있는 사업은 북한에 철도를 건설하는 것으로 평양 주재 대사관에 1년 전부터 사람을 보내 이미 타당성 조사를 마쳤다고 합니다. 독일 정부는 대륙횡단 철도가 반드시 이루어질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사업을 한국과 공동으로 추진하자고 합니다. 북한을 설득하는 일은 자신이 있다고 하는데 사전 논의가 있었던 듯합니다. 대통령님의 의중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것 참 잘되었소. 우리야 무조건 찬성이지, 우리 혼자서라도 해야 할 일인데. 거보시오. 우리가 먼저 시작하니까 결국 다들 따라오지 않소?”
“조만간 독일의 일간지 슈피겔 특파원의 인터뷰 요청이 있을 것이랍니다. 그때 넌지시 은유적으로 우리의 의사를 표시해 달랍니다. 대통령님의 의사를 알고 난 다음 비밀리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으므로 그쪽에서 외교루트를 통해 공식적인 접촉을 해 올 때까지 절대로 공론화해서는 안 된답니다.”
“그러지요. 우리도 사전에 관련 부처를 모아서 비밀리에 검토를 해 봅시다. 참, 잘했어요. 잘했어.”
“제가 잘하긴요? 저는 메시지만 가져온 건데.”
“어쨌든. 당신이 가져왔잖소.”
이 말을 마친 다음 대통령은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그가 담담하게 기다리고 있자 대통령은 결심한 듯 말했다.
“김형 3대 일간지 중의 하나를 건드리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소?”
“예, 홍보수석으로부터 무슨 말을 들으셨군요. 그중의 하나라도 순치시키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일단 약점이 있는지 조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거기 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통령님이 이런 논의를 하셔도 들으셔도 안 되는 것이니 더 이상 물어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하는 일에 내가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소. 그러니 말해도 됩니다.”
“그 셋 중에 둘은 각각 재벌 그룹을 뒤에 업고 있는 데 비해 조일은 겉으로 보기에 미디어 사업에 전념하고 있는 것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회사의 여러 계열사 중 하나인 조룡건설이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룡건설은 자기 자본에 비해 턱없이 규모가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만일 자금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룹사 전체가 위험에 빠집니다. 그리고 오너 형제들의 사생활은 난잡한 것으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두 형제와 관계된 한 여자 연예인이 자살 소동을 벌인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요?”
김인철은 권력을 가진 쪽에서 언론사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부가 사기업을 혼내줄 때 으레 써먹는 단골 메뉴인 세무조사 같은 것으로 큰 타격을 입히지는 못한다.
조일신문의 경우 조룡건설의 자금에 문제가 생기면 계열사 전체가 도산 위험에 빠지는데 조룡건설의 자금흐름을 완전히 막히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 탈세 및 각종 탈법행위에 대한 수사 공세,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너 형제의 지저분한 사생활에 관련된 약점을 파고들면 사주 측에서 자진하여 신문사의 필진을 모두 교체하거나 신문사업 자체를 포기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독재정부에서 쓰는 방법이지만 독재정부가 아니라도 그 정도는 큰 소동 없이 충분히 할 수 있다. 오히려 국민의 선거로 인해 성립된 정통성 있는 정부에서는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대통령에게 그런 말들을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은행을 시켜서 자금줄을 죄고, 개인 비리를 손에 쥔 채로 협상 아니 협박이지, 협박해서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겠다는 것 아니요?”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만두시오. 그렇게 다급한 상황도 아니고 아무리 다급해도 그런 짓은 안 됩니다.”
“아직 위급한 상황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가 차기에 한번은 더 해야 됩니다.”
“글쎄, 그만두시오.”
“..................”
“미안하오. 당신 마음은 알고 있소. 하지만 언론사에 대한 공작은 안 되오. 다른 방법으로 우리 최선을 다합시다.”
“알겠습니다. 저는 대통령님의 뜻을 거스르는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기억합니다.”
“고맙소.”
“그런데 대통령님, 저는 사임하겠습니다.
지금 나눈 대화 때문은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제가 직함을 가지고 할 일은 이제 끝난 듯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직함이 걸림돌이 됩니다. 사임한 후에도 대통령님과 대통령님의 사람들은 전과 다름없이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한지숙이라고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기자출신이고 저를 도와서 이미 많은 일을 한 사람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그 사람을 청와대에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홍보 비서관으로 두었다가 더 비중 있는 일을 맡길 수 있는지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야........., 내가 퇴임할 때 까지는 나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그래도 당신이 이미 떠난 것처럼 섭섭하군. 정식으로 사임하기 전에 천거한 사람 한번 데리고 들어오시오.”
물러나온 김인철이 주차장에 세워둔 자신의 차로 걸어가고 있을 때 문성국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를 잘 모르시죠? 극동일보의 문성국이라고 합니다. 다른 분들은 거의 아는데.........., 몇 가지 확인 할 것이 좀 있어서요. 유럽에 일주일 정도 갔다 오셨지요? 공무로 가신 겁니까? 아니면 사적으로?”
“사적인 일로 다녀왔소.”
“무슨 일인지 알면 안 될까요?”
“사적인 일이라고 하지 않았소?”
“대통령 특보는 공인입니다. 저희 언론에서 알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고요. 운영하시는 기업과 관련된 비즈니스 같던데 특보 신분으로 사업과 관련된 일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해도 됩니다. 애초에 비상근으로 계약한 거요. 다른 특보가 대학에 강의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요.”
“아! 그러시군요. 사적인 용무로 가셨는데 독일 총리는 왜 만나셨나요? 좋은 기사거리 있으면 좀 알려주시죠.”
“독일 외상이 원래 친분이 있는 분인데 그분 권유로 가서 인사를 한 거요. 간 김에 우리정부의 대북화해정책을 지지해 달라고 부탁했소. 그리고 우리나라 물건 좀 많이 사달라고 했소. 그뿐이요.”
“일행은 몇 분이나 가셨죠?”
“보아하니 당신도 갔었던 모양인데 알면서 뭘 물어보시오? 그렇게 할 일이 없소? 차비 들여가면서 나 같은 사람을 따라다니게?”
“황태산씨가 사면 받은 것은 이번에 유럽에 가신일과 관계가 있겠군요.”
“사면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소. 이번 광복절 사면의 혜택을 입은 사람은 850명이오. 그 분은 그중 한사람일 뿐이고. 내가 알기로는 충분히 사면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오. 수형 성적도 좋고.”
“참 자세히도 알고계시는 군요.”
“됐습니까? 바빠서 그만 가봐야겠소.”
“예, 감사합니다. 사무실로 한번 놀러 갈 테니 너무 박대하지는 마십시오.”
김인철은 내심 좀 귀찮아 질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곧 사임할 계획이었으므로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내 비밀 아지트는 안 되오. 묻고 싶은 일 있으면 문자 남기시오. 내 성의껏 답변해주겠소.”
“저를 기억해 두십시오.”
문성국은 ‘정치가나 관료 중에서 저처럼 얼굴에 욕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은 처음 보는군. 마치 청와대로 자원봉사라도 나온 사람 같군.’ 하고 생각했다. 뭔가 좀 특별한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부장이 밀착 감시를 하라고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는 정치부 부장과 약속한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조금 서둘러 본사로 향했다. 어차피 기사 마감 이후나 내일 아침에 회사에서 만나게 될 부장이 어중간한 시간에 특별히 만나자고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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