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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사퇴-
그는 이기용과 대화를 나눈 후 마치 신의 존재를 깨닫고 종교에 귀의한 사람처럼 마음이 편안해 졌다.
자신의 두 어깨로 검찰을, 국가를, 그리고 보수의 가치를 떠받들고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였고 거대한 수레바퀴를 돌리는 세력속의 한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기용은 그들의 전령이었고 그의 영혼을 사러 온 것이었다.
그들은 무엇이든 알고 있고,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마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용의 피로 목욕을 하여 약점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거에 날려 보낼 수 있는 비밀병기들을 수도 없이 보유하고 있었다. 돈, 정보, 인맥, 학연, 지연, 기득권, 여론영향력이 그것들 이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검찰총장 위에는 법무부 장관도 있고, 검찰총장 불러다가 호통도 칠 수 있는 총장출신 국회의원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기용이 보여준 세상에는 죽을 때까지 권력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길들이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처럼 즐비했다.
그는 숙고 끝에 38명과 함께 사퇴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사퇴하되 보수의 기치로 현 정부와 대립하다가 핍박을 받는 모습을 연출하여 야당과 보수언론의 지지와 보호를 이끌어낼 것이었다.
그의 임기는 어차피 1년도 안 남았다. 다음 총선에서 일국당 공천으로 국회에 들어갈 수도 있고 정권이 바뀌면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쪽은 언론 플레이가 마음에 안 들어도 자신들의 약속은 지킬 것이다.
38명이 사퇴한다고 해도 검찰 내에 그를 따르는 검사들은 아직 많다. 홍진표와 몇몇 사람을 통해서 다수의 검사들을 관리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회는 다시 올 것이다.
그는 희생될 38명을 하나 씩 따로 불러서 자진사퇴를 종용하기로 했다.
먼저 홍진표와 자신의 비서 일을 하고 있는 부장검사 김인규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38명에 대한 개별면담 일정을 짜고 당사자들에게 연락하는 역할을 부탁했다. 두 사람은 한영관의 살생부에는 들어있지 않았으나 X파일에는 영문 이니셜로 이름이 올라있었다.
첫 번째 면담 대상자는 대검 중수부장 오석재였다.
면담 자는 총장의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미리 홍진표로 부터 간략한 설명을 들은 다음이었다.
“총장님”
“어서 오게. 이거 좀 읽어보게. 국정원과 청와대 그리고 대검감찰부에서 조사한 자네의 비리사실이네. 인정하겠지?”
대뜸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 아니 새삼스럽게 이런 걸 다 조사하자면 뭐 안 걸릴 검사가 있나요?”
예상하고 있던 송강식은 담담하게 대답한다.
“내말 먼저 끝까지 듣게. 시인하는 걸로 알겠네. 비리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은 나와 자네를 포함해서 총 39명이네. 마침 불거져서 한창 시끄러운 X파일을 빌미로 청와대에서 특검수사를 벌일 것이네.
특검이 되더라도 검사의 협조 없이는 수사가 잘 진행되지 않아서 무혐의로 결론을 낼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불행히도 특검 후보는 철저히 수사해서 혐의사실을 입증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사람이네. 실력도 있고........,
피해가지 못할 것이네. 수사를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가 있네.
X파일을 빌미로 우리 39명 전원이 특검이 구성되기 전에 사퇴하는 거야. 그렇게만 하면 수사하지 않겠다는 언질이 있었소. 옷 벗은 다음에 변호사도 할 수 있고. 그리고 나도 같이 사퇴하는 거요.”
“생각 좀 해봐야겠네요.”
“뭘 생각해. 내가 농담하는지 알아?
다른 길은 없어. 시간도 없고. 내가 뭣 땜에 이러는 거 같아?
내 새끼들 하나라도 살리자는 거야. 나도 힘들어.
여기 동의서에 일단 서명해. 우선 39명의 의사를 모아야지. 그게 안 되면 다 같이 죽는 거지 뭐.”
“알겠습니다. 워낙 갑작스러워서.........”
“나가서 입조심하게. 기자들이 달려들면 우리만 더 힘들어지네.”
그는 홀린 듯한 표정으로 동의서에 서명하고 목례를 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송강식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서른일곱 번을 더 해야만 하는 것이다. 개중에는 반항하는 사람도 나올 것이고 개별 면담 후에 전체 회의도 거쳐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영관에게 39명의 사퇴서를 가지고 가서 선처를 부탁할 순간을 상상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 순간을 일컬어 와신상담이라 했던가, 그는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모든 굴욕을 감당할 생각이었다. 부하직원들을 위하는 길이기도 했다.
송강식이 한영관의 병실로 다시 찾아온 것은 만난 이후 딱 일주일이 지나서 였다. 한영관이 퇴원을 이틀 앞두고 재활과 체력단련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그동안 송강식은 38명에 대한 면담을 마쳤다. 끝까지 거부했던 3명을 설득하느라 진을 다 뺐다. 한 차례 최종적인 간담회도 가졌고 간담회에서 울분을 토로하거나 송강식을 원망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약점이 있는 사람들에게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당은 임시국회를 소집해 놓은 상태였다. 한영관이라는 기차는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마주오던 송강식 기차는 진즉에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을 배용석으로부터 전해들은 한영관으로서는 그들의 행동이 방향을 돌리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속도를 더 높이기 위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책을 읽고 있던 한영관은 그가 들어서자 말없이 눈을 들어 그를 응시했다. 그도 눈길을 피하지 않고 받았다. 한영관은 그 눈빛에서 이미 그가 달라졌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눈빛을 부드럽게 하였다.
송강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를 포함해서 당신의 명단에 오른 39명, 사퇴하기로 했소. 내일 기자회견을 할 생각이요.”
“어려운 결심을 하셨습니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한영관은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마지못해 하는 일이니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소. 자진해서 사퇴하는 사람들을 기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기 바라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약속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번 기소독점권을 편의적으로 행사하겠습니다.”
“어쩌면 당신 생각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소. 검찰이 어디 가서 뺨맞고 다니지나 않게 잘 이끌어주시오.”
“예, 그러겠습니다.”
송강식은 입술을 씹으면서 돌아섰고 한영관은 그를 향해 깊숙이 허리 숙여 배웅했다.
누워서 책을 읽던 한영관은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기다리던 9시 뉴스를 시청하기 위해서였다.
뉴스 앵커는 오늘 낮에 있었던 송강식을 위시한 검사들의 사퇴소식을 첫 번째로 알렸다.
“오늘의 헤드라인 뉴스입니다. 검찰 총장을 포함한 고위급 검찰간부 39명이 오늘 전격 사퇴하였습니다. X파일 사건으로 정치권과 언론의 전 방위 압박을 받아오던 검찰 수뇌부가 사퇴 카드를 꺼내자 정국은 소용돌이에 빠졌습니다. 대검찰청에 나가있는 김진호 기자가 자세한 내용 전해드리겠습니다.”
곧이어 대검청사내의 검사들이 분주히 오가는 그림을 배경으로 기자는 사퇴서를 제출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을 알렸고 X파일 폭로 이후의 진행사항과 검찰의 움직임에 대한 설명, 각계의 반응, 사퇴한 이유에 대한 분석 등을 차례로 알렸다. 기자의 멘트가 끝나고 카메라가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오자 거기에는 갓 사퇴한 검찰총장이 앵커를 마주하고 앉아있었다.
“이번 집단 사퇴 사건의 중심에 있는 송강식 검찰총장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앵커가 멘트와 함께 초대 인사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송강식도 여유 있는 표정으로 마주 인사한다.
“안녕 하십니까?”
“사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X파일에 이름이 거론된 사람들 아닙니까? 그 내용을 시인하는 것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X파일의 내용을 시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료는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수사를 해 보면 진위여부를 밝힐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과거 정권에서 자행한 불법도청에 의해 만들어진 자료로서 그런 불법자료를 근거로 수사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못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퇴가 아니라 집단 항명 정도로 봐야 하는 것이로군요. 요구 사항은 무엇입니까?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면 사퇴를 철회할 생각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가 잘못한 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검찰을 이렇게 흔들어대면 나라꼴이 안 됩니다. 요구사항은 없습니다.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퇴를 철회할 생각은 없습니다.”
“X파일에 오른 검찰 간부들이 집단적으로 사퇴를 결심하게 된 이유를 정리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크게 세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겠지요.
첫째는 보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검찰조직의 사명은 내외의 도전으로부터 이 사회와 국가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고로 어느 정권하에서든 검찰조직은 보수 세력의 근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현 정부 들어서 보수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일로 나라가 시끄러워지고 국론이 분열되는 것은 커다란 문제입니다.
둘째는 검찰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설사 우리중의 일부가 그런 일이 있었다 한들 우리는 이 나라 법을 수호해온 검사들입니다. 한낱 떡값 때문에 이렇게 마녀사냥 식으로 검찰에 돌을 던지고 매도하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셋째는 후배 검사들에게 교훈을 남기기위해서입니다. 아무리 국가를 위해서 밤잠안자고 봉사를 해도 조그만 잘못이라도 범하면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다. 그러니 공인으로서 한 점의 허물도 스스로에게 용납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이 장면에서 한영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티브이를 꺼버렸다. 가관이었다. 비리 혐의로 수사 받는 것을 모면하느라 사퇴하는 사람들이 마치 독재정부하의 반체제 인사와도 같은 언행이다.
‘저 사람들은 참 편리하기도 하군. 자신은 약속을 어기고도 상대편은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데에 추호도 의심을 하지 않으니 말이야. 기자회견을 저런 식으로 하는 것이 우리 뒤통수를 치는 게 아니면 무엇이라는 말인가?’
저 장면을 김인철이 보았다면 수사하지 않고 덮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김인철을 통해 대통령을 설득하여 이정도로 끝내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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