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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기업가 밤방 트리핫모조-
송강식이 제이피 사건에 정신을 팔고 있는 두어 달 동안 한영관은 배용석과 그로부터 소개받은 경대승, 황승호의 도움을 받아 비리 혐의자들에 대한 내사를 벌인 다음 정식 수사로 이어져야 할 대상자들을 분류하느라 조용히 분주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 김인철이 제공해 줄 거사의 계기를 기다리면 될 것이었다.
그 사이에 김인철은 김정수와 한지숙을 대동하고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그가 문정인의 전화를 받고 갑자기 귀국한지 7개월 만이었다. 회사는 헨니가 가끔씩 이메일과 전화로 사안에 따라 그의 허락을 구하기는 했지만 자연스럽게 업무분장이 이루어져 그가 없는 체제가 구축되고 있었다. 그로서는 목재 사업을 더 이상 확장하겠다는 욕심이 없었던 터라 그들만의 힘으로 현 체제를 단단하게 유지해 가는 것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그렇더라도 그는 정식으로 회사의 경영진을 발령 내고 승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일은 인도네시아 재벌기업가인 ‘비만또로’ 그룹의 회장 밤방 트리핫모조 만나는 일이었다. 그가 두 사람을 데리고 간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밤방은 인도네시아를 18년 동안 통치한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둘째 아들인데 그의 나이 40대 초반인 1990년대 초에 자신의 회사를 인도네시아 재계 서열 10위의 그룹으로 키워냈다. 아버지의 권력 탓에 가능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 자신의 탁월한 사업가적 통찰력과 수완이 아니었다면 그의 형이 그러하듯 이권에 개입하여 커미션이나 챙기는 브로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이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충격으로 대통령이던 그의 부친이 실각하고 나서 그의 능력은 증명되었다. 그의 형제들과 달리 그는 단 한건의 과거 권력형 비리로 조사받은 일이 없었고 그의 회사는 2000년대 들어오면서 오히려 재계 서열 8위로 도약했다. 김인철은 1980년대 중반 밤방이 자카르타 중심부에 호텔과 쇼핑센터를 아우르는 대규모의 복합 건물을 지을 때 프로젝트 파이낸싱에 가담한 은행의 실무자로서 자주 대면하면서 그와 친해졌다. 이후로도 그는 밤방의 잦은 부름에 응하면서 골프도 같이하고 자금 문제와 대 한국 비즈니스에 관한 조언을 해주곤 했다. 만일 김인철이 사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더라면 그의 회사에 조언자로서의 자리를 얻었을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밤방의 무한한 신뢰를 받았지만 단 한 번도 밤방의 호의나 도움을 받아들인 적은 없었다. 언젠가 한번은 크게 써먹을 때가 있을 것이고 그러자면 대등한 관계에서의 친분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이제 그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는 비만또로 그룹이 수주한 자카르타 근교에 한국 모델의 신도시를 개발하는 정부 발주 프로젝트 중 호텔, 종합병원, 쇼핑센터, 무역 센터, 사무용 건물, 고층 아파트를 아우르는 50억불 규모의 로얄 단지 시공을 한국 업체에게 맡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김인철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해 온 이유는 시공업체 선정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 일 것이었다. 그러나 김인철의 속셈은 달랐다. 이제 히든카드를 쓸 때가 된 것이다.
거의 1년 만의 만남을 위해 밤방은 특별히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가 두 명의 동료를 동반하겠다고 말했을 때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밤방은 그의 친구라면 환영한다고 말했다.
김인철 일행이 탄 메르세데스 벤츠 승용차가 자카르타 최고의 부촌인 뽄독인다에 있는 밤방의 집 앞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경비원이 뛰어나왔다. 동시에 육중한 철제 자동문이 누군가 ‘열려라 참깨’ 주문을 외운 것처럼 소리 없이 열렸다.
차에서 내린 그들이 갖가지 꽃들이 만발해 있고 푸른 영국산 잔디가 보기에도 시원하게 깔려있는 널따란 정원을 지나 현관에 도착하자 밤방 부부와 자녀들이 나와서 그들을 맞이했다.
김인철과 김정수는 양복바지에 인도네시아의 전통의상인 긴팔 바띡 상의를 입었고 한지숙은 김인철의 조언에 따라 드레스로 성장을 했다. 밤방 부부는 남녀가 각각 약속이나 한 듯 그들과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알고 있는 김인철의 조언을 따랐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김정수와 한지숙으로서는 감탄하고도 남을 만한 일이었다.
그들이 들어선 대저택은 대리석과 통유리를 많이 사용하여 현대식 감각으로 지어진 집이었고 가구는 모두 단순하면서도 클래식한 디자인의 티크 원목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가구의 통일된 색상은 담황색 계통이었다. 실내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한지숙은 가구와 장식물 하나하나가 전체적인 조화를 배려한 전문가 적 안목에 의해 배치된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집에는 가족 구성원 보다 시중을 드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았는데 그들은 주인이 초대한 손님이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김인철은 그의 공직을 말해주는 명함을 밤방에게 건네주고 한지숙과 김정수를 자신의 보좌관으로 소개했다. 그는 현재 자신이 한국 정부와 대통령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이도록 행세했다. 사실이 그러했지만.
저녁 식사로 준비된 음식은 인도네시아 서부자바 지역의 전통음식이었다. 음식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호주산 와인과 함께였다. 밤방은 하루에 세 번씩 하는 기도를 한 번도 걸러본 적이 없는 독실한 이슬람 신자였지만 술은 거부하지 않았다.
순수한 현지음식을 처음 대하는 한지숙으로서는 향이 진한 음식이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이것저것 한 번씩 맛을 본 후에 안도했다. 음식은 그럭저럭 먹을 수 있는 정도를 지나 아주 맛이 있었다. 특히 어른 손바닥 크기에 바다 가재와 육질이 비슷한 ‘우당 갈라’ 라는 이름을 가진 강 새우는 달착지근하면서 매운 양념과 어우러져 그 맛이 일품이었다.
성급한 성격의 밤방은 식사 중에 참지 못하고 자신이 벌이고 있는 인도네시아 역사상 최대의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나 김인철은 의도적으로 피했다. 미리 김을 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식사 중, 화제에 오른 김정수의 해커로서의 재능에 대해서 커다란 관심을 보였고 한지숙의 미모에 대해서는 여러 번 칭찬을 하였다.
식사를 마친 후 하인들이 과일과 커피, 그리고 차를 가져왔을 때 밤방이 참아왔던 사업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미스터 김, 한국의 건설업체 중에서 우리 사업을 맡길만한 곳으로 어디를 추천하겠소?”
“1단계 공사 예산이 50억불 정도라고 들었는데..........”
“그렇소. 5단계 전체의 예산은 300억불이요. 우리 회사의 명운이 걸렸다고 할 만한 규모의 사업이지요. 지금까지 PQ Data(Pre-qualification Data;사전 자격심사 자료)를 제출한 업체는 28개 사이고 그중에서 선정된 두 업체로부터 Proposal을 받은 상태입니다. 프랑스의 퐁네 사와 일본의 다이세이 건설입니다. 한국 업체가 최종엔트리에서 배제된 이유는 시공자가 파이낸싱을 제공해야하는 조건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최근 사정이 바뀌었습니다. 나의 친구인 부르나이 볼키아 국왕이 투자자로 합류하게 되어 시공사가 파이낸싱을 제공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제 한국 업체에게도 기회를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퐁네와 다이세이 측에 파이낸싱 제공에 대한 리스크 비용이 제외된 새로운 Proposal을 내라고 했을 것 아닙니까? 벌써 받으셨나요?”
“물론입니다. 퐁네는 이미 제출했고 다이세이는 아직 계산중입니다.”
“그들이 자금제공을 빌미로 터무니없는 바가지를 씌우려고 했고 그 때문에 스스로 자금을 조달하신 것이로군요. 문제는 그들이 새로운 조건에서 깎아줄 수 있는 한도가 제공하는 자금에 대한 이자정도를 넘어설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로군요. 그 정도로는 밤방 씨의 기준에 한참 모자라고, 너무 많이 깎아주면 처음에 바가지를 씌우려했다는 것을 실토하는 셈이 되는 것이겠지요. 퐁네의 경우는 이미 그 사실이 증명되어서 카드를 버렸다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그리고 다이세이 쪽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으신 거로군요. 한국 업체로 부터도 견적을 받아서 다이세이 카드와 비교해 보려는 것이지요?”
“맞았소. 정확하오. 그렇지만 내가 당신을 통해 한국 업체를 끌어들이는 것이 다이세이의 가격을 깎기 위한 목적으로 들러리를 세우는 것은 절대로 아니요. 아직은 어떠한 옵션에도 구속된 상태가 아닙니다. 나는 결국 한국 업체 중 하나가 시공자로 선정될 것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내가 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건과 가격의 승자가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2년 동안을 협상해 온 다이세이 카드를 우리가 버릴 수 없는 점을 이해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 회사의 조언자로서 업체 선정과 조건 협상에 미스터 김이 역할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지금 당신이 맡고 있는 공직은 언제까지 입니까? 미스터 김의 목표가 한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어차피 다시 비즈니스의 세계로 돌아올 것 아닙니까?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지금 하는 일이 정리되면 당신이 내게로 와서 이 일을 맡아주는 게 어떻겠소?”
“시공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해올 필요는 없어도 시공업체 측에서 공사완공 후 시설 분양에 일부분 책임을 지는 형태의 계약을 원하시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일개 시공업체의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니 업체의 소속된 나라 차원의 협조가 필요할 것이고, 그런 점에서 국가 정책상 해외진출에 목숨을 건 한국의 업체가 가장 유리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특별히 저에게 의논하시는 이유도 저의 현재 위치와 상관이 있겠군요. 그런데 시공 업체가 맡아야 될 몫을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역시 날카롭군요. 내가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소. 그건 30 퍼센트 정도로 생각하오. 한국계 백화점 하나 호텔 하나를 유치하고 인도네시아에 진출해있는 기업체들의 사무실을 한데 모으면 되지 않겠소?”
사실 참민정부 하의 한국 기업이 이런 일을 하는데 있어서 정부와의 특별한 관계는 필요 없다. 정부는 원칙적으로 외국에서 일거리를 따오는 기업에 아낌없는 지원을 제공해주며 그를 위한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기준에 해당되면 당연히 지원을 받게 되는 것이고 참민정부 하에서는 그 누구라도 정치적인 영향력으로 기준에서 벗어나는 지원을 받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살아온 환경 탓에 밤방은 한국에서도 정권과의 유착이 정부의 지원을 얻어내는 첫 번째 요소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김인철은 그의 그런 사고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그런 인물로 포장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직접 시공할 수도 있습니다. 대통령님도 도와주실 것입니다. 시간을 좀 주십시오. 그리고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한국 업체에 관한 한 저 아닌 다른 루트로 접촉하지 않으셔야합니다. 저는 한국 업체와는 경쟁하고 싶지 않습니다.”
김인철은 경쟁 상대로서 일본이나 여타 외국의 업체는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건설 분야에서 한국의 업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경쟁상대로 한국의 업체가 나서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한 수주를 장담해도 좋을 것이었다. 소중한 것을 걸어야 하는 입장인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밤방은 그의 말에 조금 놀랐지만 그가 상대방이 리스크 때문에 망설일 만한 제안을 가지고 오지는 않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리고 상대방의 카드를 보고나서 결정하면 되므로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흥분을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하겠소. 당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으니 기대해 보겠소.”
“언제 공사에 착수할 계획이십니까?”
“계획대로라면 지금으로부터 2년 후에는 기공식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 절차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물론 사정이 있다면 시작을 조금 연기할 수도 있지요.”
“시간은 충분하군요. 이 두 사람은 내가 나라의 일로 나설 수 없을 때 언제든지 나를 대신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미스터 밤방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일부러 데려온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인 줄 알 수 있겠습니다.”
두 사람은 그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어느덧 그들이 인도네시아에 온지 닷새가 지났다. 김인철은 계획대로 회사의 업무 분장과 인수인계를 끝내었다. 이 체제는 임시적인 조치라기보다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장기적으로 끌고나갈 포석이었다. 지분의 일부를 그란트팀버 사에 팔 것에 대비해 부사장과 자금 쪽의 자리를 비워 놓았다. 그 자신이 이 회사에 복귀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일이 끝나면 유명한 음식들을 찾고, 가창력이 좋은 흑인가수가 노래하는 클럽에서 술도 마시고 하며 남는 시간을 최대한 즐기면서 보냈다. 김인철은 골프를 하지 않는 두 사람을 배려하느라 시간적 여유가 있어도 골프는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한지숙과 둘이서만 있는 자리를 피하느라 거의 언제나 셋이 함께 다녔다. 그녀를 인도네시아에 데려온 사실에 대해서 그녀 본인이나 그 누구로 부터도 오해받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려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이 있는 것인지 스스로도 판단하기 어려웠고 독신이라는 사실 외에는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김정수가 옛 직장동료와 저녁 약속이 있다고 혼자 나가는 바람에 처음으로 그녀와 단둘이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새삼 둘이서 어디로 가기가 부자연스러워서 그냥 호텔의 뷔페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김인철은 한 끼에 여러 가지를 먹는 것 보다는 한두 가지를 집중적으로 먹는 스타일이라 주로 훈제 연어와 야채로 배를 채웠으나 한지숙은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면서 차려진 대부분의 음식을 맛보며 즐기는 것 같았다.
김인철은 한지숙과 단둘이서 식사하는 장면이 그가 무의식중에 상상하던 그림임을 깨닫고는 놀랐다. 혼자 겸연쩍어진 그는 말수가 적어졌고 간간이 그녀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다가 식사를 마쳤다. 그들은 그 곳에서 가장 어색한 한 쌍의 남녀가 되었다.
식당을 나서는 순간 그녀가 김인철의 팔짱을 끼었다.
“저를 바로 좀 데려가주세요. 그냥 자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잖아요.”
“좋지. 재즈를 좋아하시나?”
지하1층에 ‘소노라’ 라는 이름의 재즈 바가 있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아늑한 분위기의 바에는 재즈 음악에 어울리게 발랄한 여가수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약간 뚱뚱한 남자가 치는 피아노 반주에 피부가 가무잡잡하고 단정하게 예쁜 얼굴의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스카치위스키를 시켰고 한지숙은 종업원의 권유에 따라 버닝로즈라는 이름의 칵테일을 주문했다. 그들은 잔을 부딪쳐 건배를 하고 술을 마셨다. 그는 단숨에 한잔을 비우고 다시 한잔을 주문했다. 술이 들어가자 비로소 그의 행동은 조금 여유로워졌다. 김인철이 세잔 째를 시킬 때 버닝로즈를 비운 한지숙도 진토닉을 주문했다. 김인철이 건너다보니 한지숙은 반쯤 눈을 감고 가벼운 몸동작과 함께 작은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는 듯 했다.
가수가 쉬러 간 사이 Natalie Cole이 타계한 아버지 Nat King Cole의 노래에 자기 목소리를 섞어서 듀엣처럼 다시 부른 ‘Unforgettable’ 이 흘러나올 때 한지숙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결혼하신 적이 없다면서요? 왜 그러셨죠?”
“.................”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그녀는 김인철이 대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포기하고 농담으로 방향을 틀었다.
“김 선생님이 남자인건 분명히 맞는데 혹시 후천적으로 불구가?.......... 군대에서 사고나 뭐 그런 걸로.........”
“결혼을 안 한 게 그렇게도 이상한 일인가? 그런 한 기자는? 그쪽도 독신인 모양인데.”
“저를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그냥 지숙이라고 부르세요. 저는 시집을 갔다 왔고 열두 살짜리 딸이 하나 있어요.”
“아, 그렇구나!”
그는 짐작을 하고 있었는데 본인의 입을 통해 듣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딸아이는 어디 두고 왔지? 데려오거나 안 올 수도 있었는데.”
“어머니와 셋이 살아요. 그 애는 어머니와 한편이라 제가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저에게 철부지 동생을 대하는 언니처럼 군답니다. 일찍 다녀라, 술 먹지 말아라, 몸매 관리해라, 남자친구 좀 데려와 봐라,...... 온갖 잔소리를 다해요.”
“하하하하 재미있겠군. 나에게도 딸이 하나 있었으면 좋을 텐데, 나도 지숙이처럼 어디 좀 갔다가 라도 올걸.”
“예? 어디를 갔다 와요?”
“시집갔다 왔다며? 그러니 나는 장가가 되겠지.”
“호호호호 그러네요.”
“애 아빠는 어떤 사람이야? 무슨 일로 헤어졌지?”
“학교친구였지요. 둘 다 너무 어렸어요........ 그 정도만 하죠.”
“몇 년 전 지숙을 처음 만났을 때 본적이 있는 직장 상사라던 사람?..........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나? 미안해........허허 내가 별걸 다 묻네. 대답하지 않아도 되요.”
“.............음, 대답하지 않으면 마음대로 생각하실 테니 말해야겠군요? 그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 적은 있어요. 그 사람은 처음 본 순간부터 나를 좋아했던 것 같고......... 설명하자면 복잡할 것 같아서 한마디로 말하자면.........저는 사귀는 관계를 허락한 적이 없어요. 참 선생님 앞에서 그런 사람들 얘기를 해야 하다니........ 그런데 어라? 이거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네? 제가 아니라 선생님이여요. 신상 얘기를 할 사람은......... 내가 먼저 어렵사리 물었는데.”
“하하하하”
“제 질문에 대답하셔야 공평해요. 왜 혼자사시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그냥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선을 보거나 하지도 않으셨어요?”
“왜 아냐? 선을 더러 보기도 했었지.”
“그런데요?”
“상대에게 사랑에 빠진 적이 없는 거지, 뭐.”
“한국사람 중에서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나이 찼을 때 선봐서 얼굴 예쁘고, 착하고, 학벌, 집안 괜찮고 하면 대충 하는 거 아닌가요? 살다보면 사랑이 싹트는 거고.”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사랑에 대한 확신 없이 짝을 짓기 위해서 하는 결혼은 상대방에게 죄를 짓는 거야.”
“저는 결혼하여 살아보고 나서 깨달은 사실을 선생님은 어떻게 결혼도 안 해보고 그걸 아셨죠?”
“나는 결혼해도 상대방을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봐 두려웠어.”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여자를 사랑한 적이 없다는 말인가요?”
“많지. 나 혼자서 사랑한 경우는. 서로가 사랑한 경우는 딱 한번. 대학 다닐 때.”
“그러시구나, 알았어요. 필시 가슴 아픈 사연일 테니 더 이상은 묻지 않을게요.”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이정도의 대화도 30년 전의 악몽을 불러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분위기에 젖어 즐거워하는 한지숙을 앞에 둔 채로, 그는 마치 코브라와도 같이 고개를 쳐드는 아픔에 기꺼이 가슴을 내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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