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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총장 송강식-
미행을 시작한지 5일 동안 그들의 표적에게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저녁 약속이 잡혀있었다. 첫날은 조일신문 논설고문인 김달중, 두 번째 날은 홍숙현의 동생으로 고법부장검사인 홍숙조, 셋째 날은 삼송그룹의 전 부회장 현명환 이었다. 넷째 날에 저녁을 같이한 사람은 젊고 무척 세련된 외모의 소유자로 대화중에 영어를 자주 섞어 사용하는 특징을 보였는데 찍어 온 얼굴 사진 만으로는 신원을 확인 할 수가 없어서 사진과 참고가 될 만한 메모를 조사과로 넘겨 놓았다. 다섯 째 날인 오늘은 상대가 여자였다. 콘티넨탈 호텔에 있는 양식당 '웬즈데이'에서 그들은 만났다. 여자는 몸매와 얼굴이 빼어난 연예인이었지만 보통사람들이 알아볼 만큼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다. 한 시간 정도 걸려서 식사를 마친 후, 와인을 몇 잔 마셔서 얼굴이 발그레해진 여자가 먼저 일어났다. 최민식이 여러 각도에서 시계로 위장된 소형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 후였다. 그는 여자가 어디로 향할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작별을 하는 몸짓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카운터로 가서 체크인을 하고 키를 받았다. 그런 다음 식당으로 돌아가서 아직 앉아서 신문을 펼쳐들고 있는 표적에게 얇은 봉투를 던져준 뒤 도로 떠났다. 그는 지금까지 한조로 같이 다니고 있는 이해수에게 눈짓을 했다. 이해수는 로비 쪽으로 먼저 가서 여자를 기다렸다가 자연스레 그녀와 같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는 여자의 주의를 끌지 않고 여자가 들어간 방 번호 1804호를 확인한 후 곧장 내려와서 최민식과 합류했다. 잠시 후 그들의 표적인 검찰총장 송강식이 일어났다. 곧이어 최민식이 일어났다. 그는 송강식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18층으로 가서 기다렸다가 송강식이 1804호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내려왔다. 그들은 사실 확인만 하면 되었다. 불륜 현장의 증거를 확보하는 일 따위는 적어도 국정원 요원이 할 일은 아니었다. 그 정도면 수확이 있었지만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도록 커피숍의 엘리베이터가 잘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한눈을 팔아도 될 상황이었지만 직업적인 습관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계속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을 깨고 10분 정도 지나서 송강식이 혼자서 내려왔다. 이해수는 즉시 호텔 앞 발레파킹 자리에 주차된 차로 가서는 시동을 걸고 송강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송강식은 호텔 정문으로 나와서 자기차를 부르는 대신 백화점과 연결된 뒷문으로 나가서 택시를 탔다. 최민식은 이해수를 버려두고 택시를 타고 그를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오랜만에 온몸에 엔돌핀이 분출되는 느낌이었다. 일국의 검찰총장이 수족과도 같은 자신의 운전기사마저 따돌리고 밤중에 가야만 할 곳이 있다면 예사로운 일은 아닌 것이다. 그는 택시기사에게 신분증을 보여준 후 그가 탄 택시를 놓치지 말도록 부탁했다. 다행히도 택시기사는 미행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실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맡은 역할을 기꺼워했다. 추격전이 안정권에 들어서야 그는 이해수에게 전화를 하여 운전기사의 짐작에 따른 잠재적 행선지인 과천 쪽으로 방향을 잡도록 했다. 택시는 과녁을 조금 빗나가 평촌 신도시의 아파트 단지에서 멈추었다. 최민식은 미행이 표시나지 않게 택시에서 내려 자신의 넥타이를 한번 비틀어버린 다음 술 취한 사람의 걸음걸이로 아파트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는 송강식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유리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선 그가 송강식을 향해 헤벌쭉 웃으며 목례를 하자 송강식은 고개를 숙여 답한 후 더 이상 눈길을 마주치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벽 쪽으로 내던졌다. 최민식은 티브이에 가끔 얼굴이 비치기도 하는 자신을 알아볼까보아 안절부절 하는 송강식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와 같은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는 송강식이 11층을 누르는 것을 보고 18층을 눌러 그를 안심시켰다. 송강식이 11층에서 내릴 때 그는 다시 목례를 하며 문 닫히는 것을 약간 지체시켜 송강식이 들어갈 집의 방향이 왼쪽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잠시 후 도착한 차 안에서 이해수와 함께 그가 나올 때 까지 다섯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들은 송강식이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서 자신의 차를 타고 서초동에 있는 집에 도착할 때 까지 뒤를 밟았다. 송강식의 기사는 그의 보스가 한 달에 두 번 꼴로 호텔에서 꽤 오랜 시간동안 머물다가 나오는 경우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와 재미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딱 한번이지만 그의 보스가 차를 부른 다음 차가 나와서 기다리도록 한 여자와 호텔 정문 앞에서 아쉬운 작별을 나누는 장면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송강식이 귀가함으로써 일을 마친 시각은 새벽 2시 15분 이었다. 그는 앞으로 두 번 다시 송강식의 눈에 띄면 안 될 것이었지만 더 이상 그를 따라다닐 필요도 없어진 듯했다. 지저분한 일을 처리하는 하청업자는 따로 있었다. 오늘 일은 분명히 지난 10년간 자신이 존경하고 따라온 상사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건수를 올린 것일 게다.
김억수는 그의 조수이자 동업자인 마경팔과 함께 밴에서 기다리다가 윤미숙이 승용차를 몰고 나가고 꼬마의 소형차가 뒤따라 나가는 것을 보고서 케이블과 공구상자를 들고 내렸다. 인공위성 모양의 로고에 스카이케이블이라는 글자가 등판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은색 작업복 차림이었다. 윤미숙은 과천의 피부미용센터에서 두 시간 동안 피부 마사지를 받은 다음 성당에 들러 20분 정도 기도를 할 것이므로 최소한 세 시간이 경과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그녀의 귀가에 대비하여 꼬마가 그녀를 따라붙고 있었다. 여자만 사는 가정집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일은 그의 일 중에서 하찮은 일임에도 오늘의 작업을 위해서 그들은 일주일 동안이나 사전조사와 현장감시를 해야만 했다. 특별한 고객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고객의 일을 맡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인데 수고비를 부르는 대로 주는 이 통 큰 고객은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철저히 비밀로 했다. 그는 번호가 표시되지 않고 음성변조까지 된 전화기를 사용하여 연락하였으며 결과물과 수고비를 전달하는 방법도 그를 추적할 수 없도록 세심하게 짜인 그쪽의 지시를 따라야했다. 그는 새 정부 들어 일거리를 끊었던 국정원 일 것으로 추측했지만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 우연히 라도 알게 되지 않기를 소망했다. 이런 고급 고객과의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여 일거리를 잃게 된다면 그 무엇보다도 아쉬운 일이 될 것이었다. 맡긴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윤미숙과 송강식의 관계와 그들을 중심으로 한 주변을 조사해서 보낸 1차 보고에 대해서 고객은 아주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 남은 일은 식은 죽 먹기와도 같은 일이었다.
그들은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비밀번호를 누르고 자연스럽게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서는 챙이 큰 모자를 쓰고도 CCTV 카메라가 얼굴을 잡아내지 못하도록 위치를 잡았다. 도청을 당한 당사자가 그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사건이 종결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결과물이 도청당한 당사자를 압박할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당사자가 검찰총장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라면 어김없이 나중에라도 수사가 이루어진다고 봐야하므로 절대로 자신들이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도청은 그들의 고객이 국가기관이라 해도 법원의 허가가 없는 한 불법인 것이다. 1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린 그들은 1105호 현관 문 앞에 서서 마경팔이 초인종을 세 번 누르는 동안 기다렸다. 집에 아무도 없을 것을 확신했지만 안전을 위해서 규칙을 지키는 것은 중요했다. 예상대로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마경팔은 2분도 안 걸려서 도어록을 분해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들은 민첩하게 안으로 들어가서는 서두르지 않고 실내를 둘러보았다. 33평형이라 방이 세 개다. 김억수는 마이크로폰을 거실과 안방에만 설치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마경팔은 담배를 꺼내려고 손을 주머니에 대었다가 다시 손을 내리고 말았다.
“작업 중에 딴 짓은 안 된다.” 하고 김억수가 조용히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 핀다고 했냐? 나도 모르게 손이 그쪽으로 간 거지.”
머쓱해진 마경팔은 대꾸하면서 배낭을 열고 단추처럼 생긴 마이크로폰을 꺼냈다. 김억수가 먼저 응접세트 탁자 밑을 가리키자 마경팔이 손쉽게 그중 하나를 설치했다. 그곳은 거실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중심이 될 만한 위치였다. 안방은 볼 것도 없이 침대머리 뒤쪽이었다. 너무 간단하게 일이 끝났다. 꼬마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으므로 윤미숙이 예정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일이 끝났는데 더 머뭇거릴 이유도 없다.
“너무 빨리 끝나니 왠지 섭섭하네. 빨리 가서 한잔 빨자.”
점검을 끝낸 마경택의 말에도 그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작업 구역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는 결코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안방에서 거실로 막 나왔을 때 “엄마”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혀있던 안방과 마주보는 방의 문이 열리고 이십대로 보이는 잠옷 차림의 여자가 걸어 나왔다. 아주 순한 인상의 예쁘게 생긴 여자였다. 무심코 걸어 나오던 여자는 그들을 발견하고는 그냥 바닥에 주저앉았다. 순간적으로 여자가 곧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 판단한 김억수는 우선 입을 틀어막은 다음 진정시킬 생각으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만들며 재빨리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 아저씨들은 누구세요?”
다가가는 그를 보면서 그녀는 약간 놀란 얼굴로 물었다. 보통의 지능을 가지고 그 나이가 되도록 한국에서 자란 여자라면 엄청난 공포에 휩싸여야만 될 상황에 처한 그녀가 보인 반응은 의외였다. 그렇다면 이 여자의 이름은 현주일 것이다. 김억수의 머릿속에서 빠른 연산이 이루어졌다.
송광식과 윤미숙 사이에서 낳은 딸, 상당한 미모를 가졌으나 지능이 약간 떨어짐, 세 살 때 윤미숙과 다투던 중 송강식이 집어던진 탁자에 머리를 맞은 이유로 추정됨, 이름 없는 지방대학을 거의 돈의 힘으로 졸업, 13개월 전 송강식의 주도로 선을 보아 만난 평범한 남자와 결혼.
그녀가 이집에 있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일주일 동안의 관찰기간 중 치킨 배달원의 실수를 가장하여 한번, 신문 구독 권유 요원 행세로 한번, 스카이케이블 A/S요원 행세로 한번 도합 세 번에 걸쳐 집안을 들여다보았으나 윤미숙 이외의 다른 사람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 것이고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그 실수의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마무리를 하는 것이었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조금 모자란 데가 있으므로 얼렁뚱땅 넘어갈 수는 있을 것이었다.
“우리는 스카이케이블에서 A/S 왔고요, 사모님 계실 때 들어왔는데 아무말씀 없으셔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지 뭡니까? 주무시고 계셨던 모양인데 놀라셨겠네요. 잠시 후면 다 끝납니다.”
“엄마가 왜 아무 말도 안했지? 울 엄마는 어디 갔어요?”
“요 앞에 잠깐 다녀오신다고........”
그녀가 전화기를 들면 강제로 빼앗을 수밖에 없다.
“그럼 빨리 하고 가세요. 엄마 기다리실 필요 없어요.”
그녀의 말에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마경팔에게 손짓으로 이미 설치된 도청장치 해체를 지시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계속 말을 시켰다.
“전번에 왔을 때는 안보이시던데 원래 여기 사시나요?”
“시집가기 전에는 나도 여기 살았었어요. 시집 간지 1년쯤 되었나? 정말 지겨워........그이가 출근한 사이 아줌마한테 거짓말하고 집에서 도망 왔어요. 다시는 그곳에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어요. 엄마는 아기를 생각해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해요. 그렇지만 그곳 생각만 하면 끔찍해요.”
‘음, 아기를 가졌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그는 그녀가 다시 말을 잇도록 의미 없는 질문을 던져야했다.
“시집살이 하시는 건 아니잖아요?”
“네 우리 집인데 시집 식구들이 너무 자주와요. 와서는 나를 너무 시켜먹어요. 시어머니는 아줌마도 있는데 꼭 나를 시켜요. 살림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시집 식구들은 모두들 나를 무시해요.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면 벌벌 떨 사람들이........ 참 안되지. 못들은 걸로 하세요.”
그녀는 못할 말을 한 듯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는다.
“뭘 말입니까?”
“..................”
“남편 되시는 분도 싫으세요?”
“그이는 좋을 때도 있는데.......”
표정이 밝아졌다가 다시 삐친 사람의 그것으로 변한다.
“때릴 때는 너무 무서워요.”
‘남편이 폭력을 쓰는구나! 여자에게, 그것도 모자라는 여자에게 폭력을 쓰다니....... 필시 쓰레기 같은 인간 이겠군. 나라도 나서서 저 불쌍한 여자를 구해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아버지가 힘 있는 사람이니 알아서 하겠지....... 이것 참, 남의 집에 도청장치 달러 온 놈이 별 생각을 다하고 있군그래.’
하는데 까지 그의 생각이 달려왔을 때 마경팔이 도청장치 수거를 끝냈다는 신호를 보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가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나서자 그녀도 반듯하게 인사를 차렸다.
“수고 하셨어요.”
그들은 보안 카메라에 더욱 신경을 쓰면서 그곳에서 철수했다. 오늘 일은 완전한 실패다. 이로써 도청은 완전히 물 건너 간 것이다. 오늘 일은 윤미숙을 통해서 당연히 송강식에게 전달될 것이고 송강식은 특급 기술자를 동원하여 이집을 이 잡듯이 뒤질 것이다. 그나마 그들의 흔적을 깨끗하게 지워서 꼬리를 밟히지 않는 것이 고객에게 최선을 다하는 일이 될 것이었다. 고객은 오늘 밤 결과를 물어올 것이다.
그가 집에서 마경팔과 꼬마를 데리고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인 밤 9시 경 고객의 전화가 걸려왔다. 예상한 시각이었다. 경팔은 기분도 꿀꿀하고 하니 노랑이 짓 말고 여자 있는 술집에 가서 기분 좀 풀자고 바람을 잡았지만 그는 고객의 전화를 기다려야 했으므로 거절했다. 경팔은 친구 사이지만 언제나 그의 말에 복종했다.
“갑돌이 입니다.”
예의 굴곡 없는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 갑돌이는 고객의 호칭이었고 이쪽은 을식이로 불린다.
“전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번일은 실패했습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선금을 돌려드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오늘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해보시오. 을식이는 안전하오?”
“예, 을식이의 신분은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군대에서 부하가 상관에게 보고하는 말투로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국정원 청음1실, 김억수의 보고가 끝나자 최민식은 대답을 하는 대신 일단 마이크의 스위치를 끈 다음 옆에 앉아있는 서석준을 바라보았다. 서석준이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쓸 만한 친구로군” 하고 독백처럼 말한 다음 스위치를 켜고 갑돌이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되었군요. 을식이의 잘못으로 볼 수는 없겠소.”
“천만에요. 저희가 큰 실수를 하는 바람에 일을 망쳤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변수는 있는 법인데 사람이 다치지 않고 을식이가 노출되지 않았으니 다행이오. 그리고 뒷마무리를 참 잘했소. 프로답소. 그리고 이미 한 일도 있으니 선금은 돌려줄 필요가 없소. 이번 케이스는 이걸로 종결합니다. 다시 일 있으면 연락하겠소. 조심하시오.”
“감사합니다. 다음 일 기다리겠습니다.”
김억수는 갑돌이에 대한 존경심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삼청동 안가의 철 대문 앞에 김인철의 차가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동문이 스르르 열렸다. 정문 경비원은 차를 향해 거수경례를 한 뒤 손짓으로 주차할 곳을 지정해 주었다. 그가 깔끔하게 차를 세우자 기다리고 있던 정장차림의 요원이 문을 열어주면서 말했다.
“국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중의 보안 문을 통과해서 안내된 방으로 들어서자 두 사람이 담소를 나누다가 반갑게 그를 맞았다. 제주도에서 만난 지 3주가 지났는데 그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낸 김인철은 3일 만에 다시 만나는 느낌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을 대하자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던 근심들이 가라앉으면서 마음이 훈훈해졌다.
김인철이 들어서며 두 사람에게 쾌활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건넸다.
“석준이! 한 형! 그 동안 어떻게들 지내셨나?”
한영관도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 형은 좋은 일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싱글벙글하시는 걸 보니.”
이 말에는 자기 순서라는 듯 서석준이 대답했다.
“이 친구는 원래 나만 보면 좋아서 저럽니다.”
그들은 할 일을 잊은 채 한동안 정담을 나누었고 한참 후에야 보고를 해야 할 위치에 있는 서석준이 먼저 본론으로 들어갔다.
“과거에 우리 회사에서 내사를 해온 검찰 간부들은 76명이고 그중 비리혐의가 있는 현역은 총장을 포함하여 46명입니다. 총장은 우리가 가진 자료에 의하면 모두 여섯 건의 위법, 또는 비리 혐의가 있습니다. 물론 해마다 수차례씩 이루어진 떡값이라 치부되는 소액의 금전수수는 제외하고 입니다. 위장전입과 부동산투기(전매) 1건, 부동산관련 탈세 1건, 이건 개입 1건, 사건관련 뇌물수수가 3건 인데 그중에서 아직 공소시효가 살아있고 증거가 확보되어 기소가능한 건은 뇌물수수 혐의 두건입니다. 1997년 서울지검 부장검사로서 한보사건수사 시 7억을 받았고 2002년 대구 고검장 재직 시 지하철공사장 붕괴사건으로 기소된 대룡건설로 부터 20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잠깐”
그때 김인철이 말을 끊었다.
“전자는 문민정부 말기에, 후자는 국민의 정부 시절에 일어난 일이로군. 국정원이 내막을 다 파악하고 있으면서 기소하지 않은 이유가 뭐지? 대통령께도 보고가 되었을 것 아닌가?”
“글쎄, 보고가 되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국정원 내에서도 정보가 공유되는 것도 아니고........., 나 자신도 이번에 존안 자료를 손에 넣기 전에는 그렇게 많은 검찰 간부들이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줄은 몰랐으니까. 국정원 사람들이나 정권 핵심부 인사들도 여러 가지 약점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테니 서로 간에 모종의 암묵적 합의 같은 것이 있었을 것으로 보네. 그런 점 외에도 검찰 뿐 아니라 비리에 연루된 공직자들의 과거를 들추어서 나라를 발칵 뒤집는 대신 과거의 일은 덮고 점진적인 개혁으로 가닥을 잡은 김대중 정부의 방침도 부분적인 이유가 되겠지.”
“으음....... 믿을 수가 없군.”
한영관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면서 반 신음소리를 내었고 서석준은 두 사람에게 번갈아 눈길을 준 다음 계속했다.
“한 달여 동안 총장에 대한 정밀내사 결과 이 두건은 사실임이 확인되었고 기소를 위한 증거도 확보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이 사람은 사생활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사법고시에 합격하기 전 사실혼 관계에 있던 윤미숙과의 사이에 방년 25세인 딸 송현주를 두었으나 사실을 숨기고 오방그룹 오너의 차녀인 오승희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초기에 윤미숙과 헤어지려하였으나 윤미숙의 자살위협으로 야기된 다툼도중 그가 던진 탁자에 머리를 맞은 송현주의 지능에 문제가 생기자 헤어지기를 포기하고 숨겨서 25년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는 오승희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었고 부인은 윤미숙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윤미숙의 아파트에 윤미숙과 같이 있는 장면을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은 몇 장 확보하였으나 두 사람의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는 없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녹취하기위한 도청 시도가 예기치 않은 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쯤 그는 누군가 자신을 염탐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행이나 염탐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행이도 염탐하는 측이 우리라는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한영관은 서석준의 말을 듣자 왠지 배알이 틀어졌다. 부끄러운 마음과 함께 누구에겐지 모를 분노가 치밀었다. 그 불똥은 서석준을 향해 튀었다.
“뭐 하러 총장의 사생활까지 염탐을 한단 말이요? 도청은 불법이고 불법으로 취득한 정보는 증거능력도 없다는 걸 모르시오?”
“한 형 심정은 알겠소. 나도 스스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청와대의 뜻에 따라 내손으로 우리조직의 살생부를 만들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껴보았기 때문입니다. 한 형이 잊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스파이 조직입니다. 하는 일이 사실상 대부분 불법입니다. 법대로만 하자면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하는 일의 목표로 말하자면 정말로 정권도 통수권자도 아닌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하겠지만 우리 조직에서 그 수단이 문제가 된다고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미국의 CIA도 그렇고 그 어느 나라의 정보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 회사의 내사 대상이 된 사람에 대한 미행, 도청 정도는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그것을 나중에 써먹든 안 써먹든, 증거 능력이 있든 없든 말입니다. 병원에 가면 혈압 재고 피검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총장에 대한 도청시도와 실패에 대해서 굳이 이 자리에서 설명하는 이유는 총장이 자신에 대한 감시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그것에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내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유의 실패는 만의 하나 꼴로 일어나는 일로서 행위자의 부주의를 탓할 수 없는 경우입니다.”
서석준의 대답은 단호하게 들렸다.
“자신을 도청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이 참정정부의 사람들이라고는 당하는 사람도 믿기 힘들 정도로 이 정부의 성격에 맞지도 않고 대통령의 원칙을 벗어나는 일이지만 당분간은 어쩔 수 없어요. 구시대의 막내의 행위자로서 우리가 이런 일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소?”
김인철의 말이었다. 각오한 바이지만 막상 대통령의 원칙에 어긋나는 행위들이 구체적으로 오르내리자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이만한 일로 마음을 쓰는 나약함을 버리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대통령님도 알고계신 거요? 이런 식으로 일하는 것 말이요.”
한영관은 검사로서 권의주의 시절부터 자신의 소신을 지켜 불법적인 일로 손을 더럽혀본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정작 옳은 뜻을 위해서 그런 것들은 묵인, 동조해야하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료 중 46명이나 비리혐의를 받고 있는 조직에 속해있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갖는 것 자체가 더 모순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머쓱해졌다. 그래서 조금 가라앉은 어조로 말한 것이었다.
“대통령이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겠소? 절차와 방법의 정당성 등은 일하는 사람인 우리들이 알아서 판단해야 하는 것 아니요. 법적인 책임은 각자 지는 것이고. 대통령에겐 일이 잘못되었을 때 우리를 신임한 도덕적인 책임이 돌아가겠지요. 우리가 대통령의 도덕성을 위해서 또는 자신의 결벽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정도만을 고집한다면 집권이후 지금까지 해 온대로 무능한 정권으로서의 행동반경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을 필요도 없겠지요. 적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고 있는 판에 이 나라를 위해서 옳은 일을 하는 우리가 거리낄게 뭐가 있겠소?”
김인철은 한영관의 갈등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런 논쟁에 쐐기를 박을 요량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총장에 대한 내사는 끝난 겁니까?”
한영관은 한참의 침묵 끝에 선선히 그의 말을 인정했다. 그리고 실무로 화제를 돌렸다.
“예, 끝났습니다. 참민정부 들어 검찰인사에 대한 내사는 제가 진행한 총장에 대한 것이 유일한 것입니다. 46명에 대한 것은 존안자료에 나와 있는 내용으로 제가 사실여부를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 총장 내사 결과와 함께 46명의 명단과 혐의가 적시된 문건은 헤어질 때 한 검사장께 드리겠습니다.”
당사자인 서석준의 대답이었다.
“그걸로 내가 어찌해야 되겠소?”
이 질문에는 당연히 김인철이 대답했다.
“원래 대통령의 방침이 그러했듯 검찰의 개혁은 검찰 스스로의 손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한 검사장에게 그 일을 맡기신 것 아니겠습니까? 한 형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조치를 취하시면 됩니다. 살생부를 정하는 것도 일을 수행할 사람을 쓰는 것도 한 형이 알아서 하셔야지요. 검찰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미래에 나아갈 길은 어디인지 한 형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만 사람을 잘못 쓰지 않도록 주의를 하셔야 할 겁니다. 저희는 한 형이 요청하는 외부의 도움을 제공하겠습니다.”
“저도 검찰 내부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고 까마귀와 백로를 구분해 내자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워낙 한직으로만 돌아서 내부사정에 많이 어둡습니다. 시간에 쫓겨야하는 상황은 아니겠지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시지요. 국가적으로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겠습니까?”
김인철은 맏형처럼 자애롭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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