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호: 지금부터 냉정하게 뼈아픈 질문을 던져봐야겠습니다. 왜 우리는 2007년 수구·보수 세력에게 정권을 빼앗겼을까요? 왜 우리는 지금 그토록 비판하는 이명박에게 정권을 내줘야 했을까요?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시민사회는 시민사회대로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우선 그동안 정치권에 몸담아온 진보·개혁 진영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진보·개혁 진영의 정치권이 한마디로 혁신결핍증에 걸려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정권을 수구보수 세력에게 빼앗긴 첫 번째 이유라고 봅니다. 그동안 민주당이건 민주노동당이건 진보신당이건 "당신들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 혁신해야 산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예컨데 민주당의 386세대 국회의원들에게는 "더 이상 구정치인들의 참모 노릇만 하지 말고, 스스로 독립해 사회경제적 민주화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쪽 사람들에게는 "옛날의 운동권 방식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대중적 진보정당으로 거듭나라" 등의 주문들이 오래전부터 계속됐죠. 그런데 대중들이'아, 이 사람들 정말 스스로 혁신하고 있구나'라고 피부로 느낄 정도의 획기적 모습은 보여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왜 오래된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변신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조국: 그들도 이제 '영주'가 됐기 때문이죠. 군부독재 때는 야당이라는게 의미가 없잖아요. 체체나 지도자를 비판하면 감옥에 가거나 고문을 받고 심지어 죽기까지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1987년 헌법체제'가 안착되면서 야당이 권력을 못 잡더라도 항상적으로 일정한 지분을 가질 수 있게 됐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이들이 과거처럼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 겁니다.
과거에는 '제로'였는데 지금은 나름의 권력과 명성을 갖게 되니까 사고방식도 행동방식도 달라진 것이죠. 386세대 운동원 출신도 국회에 많이 들어갔지만 선수選數가 쌓이고 당 고위간부가 되다 보니까 자기가 갖고 있는 지분과 세력을 유지하는 데 급급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 '투사'가 '영주'로 변모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영주는 왕에게 받은 봉토가 있고, 자신에게 속한 농노도 있고, 일정한 조건 아래 중앙의 왕과 교섭할 수도 있잖아요. 왕과 맞서기보다는 그냥 영주로 사는 것이 안전하고 행복하죠.
왜 오래전부터 혁신하라는 주문은 많았는데 혁신하지 않을까요? 그들이 언제부터인가 영주처럼 사고하고, 영주처럼 행동가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극단적으로 의심하자면, 왕이 되기를 포기한 거죠.
과거 노무현은 낙선을 뻔히 예상하면서도 계속 불리한 지역에 출마했죠. 박근혜는 여의도에 천막 당사를 쳤어요. 천정배는 의원직사퇴서를 낸 뒤 민생포장마차를 끌고 전국을 돌았고, 복귀 후 국회를 떠난 기간 동안의 세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정희는 촛불 시민과 함께 '닭장차에' 끌려 들어갔죠.
이런 것이 '쇼'라는 지적도 있지만, 정치인은 대중이 보고 싶어하는 '쇼'를 적시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대중은 정치인의 말이나 행동을 100퍼센트 믿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 사람, 진정성이 있구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저 사람이 해주는구나', '나의 꿈과 고통을 저 사람이 알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되면, 그를 밀어줍니다. 이런 '쇼'를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무게'를 잡고 '급'을 따지면서 '거물' 행세를 하거나 당내 권력 투쟁에 몰두하는 모습만 보이면 대중은 채널을 돌려버리죠. '왕'이 되기를 포기한 '영주', '왕' 밑에서 안주하는 '영주'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야 기분좋다